브라질 이민 50년, 한 이민자의 삶을 돌아보다 – ⑫ 어쩌다 나는 그곳에 가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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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내가 한인회 일을 돕게 된 이유는 거창하지 않았다. 내 성격상 한인회와 엮일 일은 원래 없었다. 다만 그 자리에 오랜 친구, ‘홍일이’가 있었다. 마음에 빚처럼 남아 있던 친구였고, 그래서 그 형의 부탁을 끝내 외면하지 못했다. 어쩌면 친구에게 진 빚을 다른 방식으로 갚는 일이라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 한인회 홍보였고, 이내 한인회보 제작까지 맡게 되었다. 회보에 실을 내용을 찾다 보니 자연스럽게 브라질 사회 속에서 묵묵히 좋은 일을 하는 한인들을 찾아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그분들의 이야기를 우리 한인들에게 전해 조용히, 그러나 깊게 가슴을 울리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한인회의 문화부회장이던 Lisa 님을 통해 ‘마리아 수녀회’라는 곳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썽베르나르도 쪽에,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학교가 있다는 말이었다. 2011년 3월 6일 GPS에 주소를 찍고 길을 나섰다. 일요일이라 도로는 한산했지만, 도시를 벗어나자 길은 점점 낯설어졌다. ‘이런 곳에 학교가 있을까?’ 솔직히 반신반의했다. 쌍베르나르도(São Bernardo) 시 안으로 들어왔지만 골목을 몇 번이나 헤매야 했고, 길 끝자락에 다다랐을 때도 확신은 들지 않았다. (당시 GPS는 지금처럼 정확하지 않아 오류가 잦았다.) ‘설마 저기는 아니겠지.’ 이런 구석진 곳에 제법 반듯한 출입구를 가진 건물이 보였지만 처음엔 그냥 지나쳤다. 차에서 내려 가까이 다가가 문 앞에 붙은 작은 안내문을 보고서야 내가 찾던 곳이 맞다는 걸 알았다. 일요일이라 문은 닫혀 있었고, 인터폰으로 떼레자 수녀님을 만나러 왔다고 전하자 잠시 후 문이 열렸다. 들어서는 순간 수녀님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솔직히 말해 조금 당황했다. 외딴 동네, 구석진 곳. 그런데 그 안에 들어선 건물은 내가 상상하던 ‘조그만 학교’와는 전혀 달랐다. 신축 건물, 길게 이어진 복도, 정갈하고 단정한 내부. ‘여기가… 맞나?’ 수녀원인지, 학교인지, 병원인지 한눈에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

브라질 이민 50년, 한 이민자의 삶을 돌아보다 – ⑪ 웃으며 살다, 웃으며 떠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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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아는 쌀 할아버지, 미다할아버지 한인분들은 그분을  미다할아버지 , 혹은  쌀 할아버지 라고 불렀습니다. 저는 1976년에 이민을 왔는데, 가끔 식품점이나 교회에서 그분을 뵙곤 했습니다. “안녕하세요”라는 짧은 인사 외에는 말씀이 거의 없으신 분. 제 기억 속의 미다할아버지는 늘 먼저 인사를 건네시고, 말 대신 미소만 지으시던 분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저 분이 미다 할아버지야” 하고 조용히 속삭이던 장면이 지금도 떠오릅니다. 1970년대 후반, 브라질 한인교회마다 부흥회가 잦던 시절에도 미다할아버지는 늘 그 자리에 계셨습니다. 한국 사람이 그리워, 한국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신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한인들의 보증을 많이 서 주었다가 재산을 거의 잃었다는 이야기, 예전에 있던 한인 유원지 역시 그분의 기증으로 마련되었다는 말도 뒤늦게 전해 들었습니다. 미다할아버지의 선행은 늘 이렇게 조용히, 뒤에서  알려졌습니다. 10년 전쯤, 그분의 이야기를 더 알고 싶어 수소문하던 중 IMOSP 신문에 미다할아버지의 삶이 연재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오지원 기자가 쓴 글을 통해 그분의 삶을 조금 더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미다할아버지를 기억하는 분들의 증언은 한결같았습니다. 어디를 가시든 먼저 남을 먹이던 분, 넘치는 것이 있으면 꼭 챙겨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던 분. 정작 본인은 늘 도시락을 싸 다니며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하셨다고 합니다. 저에게 허리가 아파 자주 치료를 받으러 오시던 한 권사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평생 편안한 얼굴을 본 분이 딱 두 분인데, 한 분은 암으로 투병하시던 분이고, 다른 한 분이 바로 미다할아버지셨어요.” 늘 웃으셨고, 늘 감사하셨고, 끝까지 사람을 기억하며 안부를 물으셨다고 합니다. 미다할아버지는 말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저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남을 위해 사는 것이 무엇인지, 조용한 선행이 얼마나 오래 남는지를. 미다할아버지의 선행은 오늘도 많...

브라질 이민 50년, 한 이민자의 삶을 돌아보다 – ⑩ 친구들, 사람으로 남은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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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브라질 한인 이민 50년 전체 글 목록 보기] ① 친구가 많지 않았던 이유 어려서부터 나는 내성적인 편이었다. 왜 친구를 잘 만들지 않았는지는 지금도 정확히 모르겠다. 좋게 말하면 조용한 성격이고, 나쁘게 말하면 남에게 먼저 다가가지 않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친구가 크게 필요하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는 동갑 사촌이 네 명이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나는 체력이나 두뇌 면에서 늘 제일 뒤처진 편이라고 느끼며 자랐다. 한국에서 중학교 1학년 때, 팽이를 사고 싶어 친구 집에 간 적이 딱 한 번 있다. ㅎㅎ 이제 막 또래들과 조금씩 어울릴 수 있을 무렵, 중학교 2학년을 마치지 못하고 다음 해 브라질로 오게 되었다. ② 말도 통하지 않던 첫 시작 브라질에 도착한 지 한 달쯤 지나 Anglo-Latino 학교에 입학했을 때, 말 한마디 통하지 않던 나에게 처음 본 한국 학생들이 아무 조건 없이 다가와 도움을 주었다. 그중 홍일이라는 친구는 내 짝꿍이 되어 필요할 때마다 통역을 해 주었다. 단 한 번도 싫은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내가 워낙 말이 없는 성격이라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지만, 5년 동안 같은 반에서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늘 도움을 받기만 했던 나는 언젠가 꼭 이 친구에게 보답하고 싶다는 마음을 조용히 품고 지냈다. ③ 친구들 Osasco에 살던 Sung라는 친구도 있다. 나와 비슷한 나이인 것 같았지만 정확한 나이는 당시 끝내 알려주지 않았다. 거의 브라질 사람에 가까운 친구로, 굳이 비율을 따지자면 브라질 70%, 한국 30%쯤 된다고 본다. 주말이면 Sung 형제가 한 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와 토요일, 일요일을 거의 함께 보내곤 했다. 지금도 자주 본다. 얼마 전 내 생일에는 “브라질에서 50년 된 친구”라며 여럿이 함께한 식사비를 모두 계산했다. 나이가 들수록 철이 드는 친구다. ㅎㅎ 고맙다, 친구야. 또 한 명, 인 씨 성을 가진 친구가 있다. 여린 독불장군 같은 성격이지만 정이 깊고, ...

브라질 이민 50년, 한 이민자의 삶을 돌아보다 – ⑨ 삶과 죽음 사이에서 다시 바라본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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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브라질 한인 이민 50년 전체 글 목록 보기] 강명관 선교사와의 만남과 어머니의 죽음 어떻게 죽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 요약 아마존 선교사를 진료실에서 만나며, 삶의 무게가 몸에 남긴 흔적을 보게 되었다. 그 만남은 어머니의 죽음을 다시 떠올리게 했고, 어떻게 죽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 를 묻게 했다. 진료실에서 만난 한 사람 2013년, 아니면 2014년쯤이었을 것이다. 수염이 더부룩한, 인상 좋은 아저씨 한 분이 한의원에 오셨다. 잘 웃고, 아재 개그도 섞어가며 분위기를 풀려 하셨다. 본인은 재미있어 하셨지만, 나는 진료를 하며 점점 고개를 갸웃하게 되었다. 속이 불편하다 하셨고, 목도 불편하다 하셔서 살펴보니 경추 디스크가 있었다. 무릎은 양쪽 모두 오래전부터 슬개골 주변 통증이 있었고, 눈도 좋지 않고, 허리·어깨·팔꿈치까지… 한두 군데가 아니라 몸 전체가 망가져 있었다. ‘이분은 대체 무슨 일을 하시길래 이렇게 아프신 걸까.’ 아마존 선교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 직업을 여쭤보니, 아마존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라고 하셨다. 그제야 이 몸 상태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아마존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을 적지 않게 보아 온 나로서는, ‘선교를 한다’는 말만으로 누군가를 쉽게 좋게 보지는 않게 되었다. 들어갔다가 얼마 못 버티고 포기하고 나오는 사람도 있었고, 안타깝게도 제도나 현실을 이용하려는 모습들을 보아 온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브라질은 전통적으로 천주교 국가이며, 종교인에 대해서는 사회적으로도, 제도적으로도 비교적 관대한 나라다. 정식으로 브라질에 입국해 영주권을 취득하는 여러 경로 가운데 종교 활동을 통한 체류는 행정적으로 비교적 수월한 편에 속해 왔다. 목사나 선교사의 경우, 소속 교회에서 초청장을 받으면 비교적 쉽게 입국이 가능했고, 그 과정이 영주권 취득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런 배경 속에서 한동안 아마존 선교는 신앙과 사명, 그리고 현실적 목적이 뒤섞인 공간이기도 했다. 이러한 흐름이 반복되면서 현재는 아마존 선교를 ...

브라질 이민 50년, 한 이민자의 삶을 돌아보다 ⑧ 김학종 목사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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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브라질 한인 이민 50년 전체 글 목록 보기] 김학종 목사님 부부와 아버지·어머니 (1980년대) 브라질 이민 초기, 교회는 단순한 종교 공간이 아니었다. 그곳은 사람이 사람을 만나 버텨낼 힘을 얻던 자리였다. 그 중심에는 말없이 자기 몫을 감당하던 목회자들이 있었고, 그중 한 분이 김학종 목사님 이었다. 목자 없는 교회에 들어오다 가나안교회와 남미교회가 하나로 합쳐진 뒤, 교회는 한동안 방향을 잃은 상태였다. 담임목사는 갑작스럽게 사임했고, 재정은 바닥이었으며, 규모도 작아 선뜻 맡으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김학종 목사님이 이 교회를 맡겠다고 나섰다. 조건은 단순했다. 2년간 무보수. 말은 쉬웠지만, 실제로 그렇게 사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아무것도 필요치 않던 사람 김 목사님은 자신을 위해 요구하는 것이 없었다. 당시 값이 꽤 나가던 Yamaha 올갠을 직접 구입해 교회에 기증했고, 생활비도 받지 않고 지냈다. 교인들 대부분은 목사님의 실제 생활형편을 알지 못했다. 무보수로 사역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무 내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저 “목사님은 형편이 괜찮은 분이겠지”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김 목사님을 보아왔던 나 그 시절, 나는 교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성가대를 돕고 주보를 만들었다. 목사님의 첫째와 둘째는 나와 나이가 비슷해 자연스럽게 친구처럼 지냈다. 장로에서 목사가 되신 분이어서인지 유머 감각도 있으셨지만, 강단에서는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던 분이었다. 영광교회는 3~4년 사이 눈에 띄게 성장했고, 우범지역이던 옛 한인촌을 떠나 현재의 Pari 지역으로 이전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 목사님은 조용히 미국으로 떠났다. 자신의 몫을 마친 뒤, 교회가 더 성장하길 바라면서였다. 떠난 뒤에야 보였던 삶 미국으로 가시기 전, 김 목사님 댁의 이삿짐을 도운 적이 있다. 그 집에는 침대가 없었고, 일인용 매트리스 몇 개와 최소한의 물건만 있었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김 목사님은 정말로 아무것도 남기지 ...

브라질 이민 50년, 한 이민자의 삶을 돌아보다 - ⑦ 기다려지는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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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브라질 한인 이민 50년 전체 글 목록 보기]   지금은 다른 모습이 되었지만, 저 빨간 건물은 1970년대 한인들이 모이던 ‘궁전’이라는 식당이 있던 자리다. 브라질 이민 초기, “오늘 하루를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할까”라는 생각은 사치였다. 밖으로 나가는 일은 제한이 아니라 금지에 가까웠고, 친구를 만나는 일은 꿈도 꾸지 못했다. 사실 초반에는  친구를 사귈 틈조차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일요일이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특별한 계획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곳에 가면  사람이 있었기 때문 이다. 그곳은 바로 교회였다. 브라질에 처음 왔을 때 가장 막막했던 것은 언어였다. 한글과 알파벳은 출발선부터 달랐고, 14~15살이라는 나이는 새로운 언어에 완전히 적응하기엔 애매한 시기였다. 어르신들 가운데는 아예 언어를 내려놓은 분들도 많았다. 10년, 20년이 지나도 필요한 말만 겨우 하는 모습은 이민이 시간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임을 보여주었다. 낯선 땅에서의 작은 위로 다행히 브라질은 한인들이 자주 먹는 채소가 비교적 풍부했고, 쌀이 주식인 나라였다. 이런 배경에는 이 땅에 먼저 뿌리내린 일본 이민자들의 공이 컸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근면함 덕분에 같은 얼굴을 가진 한국인들 또한 현지 사회에서 비교적 좋은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반면, 모든 동양인이 일본인으로 보이는 시선 속에서 일본 사람으로 취급받는 불편함도 함께 존재했다. 브라질 현지인들의 성격은 전반적으로 느긋했다. 그들과 함께 일하던 한인들은 처음엔 많이 답답해했다. 모든 걸 빠르고 정확하게 해내는 데 익숙한 우리에게 그들의 방식은 쉽게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느림에도 장점이 있지 않나 생각하게 된다. 건강을 다루는 내 관점에서 보면, 이런 느긋함은 정신적·육체적 건강을 오히려 덜 해치기도 한다. 일요일이 되면 브라질의 일요일은 유난히 조용했다.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고, 도시는 잠시 숨을 고른다. 옛 한인촌이었던 Rua Co...

브라질 이민 50년, 한 이민자의 삶을 돌아보다 - ⑥ 살면서 보이기 시작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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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브라질 한인 이민 50년 전체 글 목록 보기] 브라질의 좋은 점, 그리고 다른 점 며칠 전, 한의원 앞에서. 오늘은 브라질에서 살며 시간이 흐른 뒤에야 보이기 시작한 좋은 점과 다른 점들을, 내가 겪은 생활의 기억 속에서 정리해 보려 한다. 지난 글들에서는 초기 농업이민 세대 이후, 1970년대 전후 브라질에 도착한 세대가 겪어야 했던 불안과 고통의 시간을 기록했다. 최근 들어 브라질인들의 미국 불법 이민이 급증했고, 체포·수감된 뒤 수갑을 찬 채 브라질로 추방되는 모습이 여러 차례 보도되었다. 그 장면들을 보며 40~50년 전 이 땅에서 같은 불안을 안고 살아야 했던 우리 한인들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겹쳐 떠올랐다. 그 고통을 알기에, 지금의 추방 과정이 조금 더 인간적이었으면 하는 마음도 함께 들었다. 미국은 오래전부터 ‘꿈의 나라’로 여겨졌지만, 돌이켜보면 당시의 브라질 또한 의외로 살아볼 수 있는 나라였다는 사실을 이곳에서 조금씩 알게 되었다. 집을 구한다는 것 브라질 이민 첫 한 달은 옛 한인촌이었던 Rua Conde de Sarzedas에서 오사장님 가족과 함께 방 하나를 쉐어하며 시작되었다. 영주권이 없으면 집을 구할 수 없었고, 영주권이 있어도 보증인과 신용이 필요했다. 집을 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민자에게는 큰 장벽이었다. 부모님은 그 거리가 살 곳이 아니라는 판단 아래 조금 떨어진 Rua Buenos de Andrade로 이사하셨다. 가정집이었고 방이 세 개라 형제들은 이층침대를 쓰며 지냈다. 그러나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다시 급히 이사를 해야 했다. 그 이유를 그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주변 봉제 가정에 대한 연방경찰 단속 때문이었다. 안전을 찾아 옮긴 Cambuci 다음으로 옮긴 곳은 Cambuci의 Rua Professor Camilo Bergenson 14번지였다. 어린 시절 집을 잃어버릴까 봐 아버지가 외우게 하신 긴 주소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그 집은 방이 다섯 개인 큰 집이었고 월세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