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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이민 50년, 한 이민자의 삶을 돌아보다 ⑧ 김학종 목사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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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종 목사님 부부와 아버지·어머니 (1980년대)

브라질 이민 초기,
교회는 단순한 종교 공간이 아니었다.
그곳은 사람이 사람을 만나
버텨낼 힘을 얻던 자리였다.

그 중심에는
말없이 자기 몫을 감당하던 목회자들이 있었고,
그중 한 분이
김학종 목사님이었다.


목자 없는 교회에 들어오다

가나안교회와 남미교회가 하나로 합쳐진 뒤,
교회는 한동안 방향을 잃은 상태였다.
담임목사는 갑작스럽게 사임했고,
재정은 바닥이었으며,
규모도 작아
선뜻 맡으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김학종 목사님이
이 교회를 맡겠다고 나섰다.

조건은 단순했다.
2년간 무보수.

말은 쉬웠지만,
실제로 그렇게 사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아무것도 필요치 않던 사람

김 목사님은
자신을 위해 요구하는 것이 없었다.
당시 값이 꽤 나가던 Yamaha 올갠을 직접 구입해
교회에 기증했고,
생활비도 받지 않고 지냈다.

교인들 대부분은
목사님의 실제 생활형편을 알지 못했다.

무보수로 사역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무 내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저
“목사님은 형편이 괜찮은 분이겠지”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김 목사님을 보아왔던 나

그 시절,
나는 교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성가대를 돕고
주보를 만들었다.

목사님의 첫째와 둘째는 나와 나이가 비슷해
자연스럽게 친구처럼 지냈다.
장로에서 목사가 되신 분이어서인지
유머 감각도 있으셨지만,
강단에서는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던 분이었다.

영광교회는
3~4년 사이 눈에 띄게 성장했고,
우범지역이던 옛 한인촌을 떠나
현재의 Pari 지역으로 이전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 목사님은
조용히 미국으로 떠났다.
자신의 몫을 마친 뒤,
교회가 더 성장하길 바라면서였다.


떠난 뒤에야 보였던 삶

미국으로 가시기 전,
김 목사님 댁의 이삿짐을 도운 적이 있다.
그 집에는 침대가 없었고,
일인용 매트리스 몇 개와
최소한의 물건만 있었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김 목사님은
정말로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교회를 위해 살았다는 것을.


미국에서도 같았던 선택

김 목사님은
미국 LA에 있는 교회에서도
담임을 맡았지만,
그곳에서도 무보수였다.

어느 날,
목사님 댁에서
브라질에 있던 둘째 아들 김성현이 보낸
편지를 읽게 되었다.

국제전화비가 비싸던 시절,
서툰 한글로 적힌 그 편지에는
브라질에서 교회를 섬기던 당시
집에 먹을 것이 없어
셋째가 Feira(시장)에서
사람들의 짐을 들어주고 받은 돈으로
빵을 사 먹으며 울었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목사님은
아이들에게조차
그 어려움을 내색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이들도 아버지의 뜻을 알았는지,
사람들, 그리고 교인들 모두
이런 힘든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끝까지 강단에 섰던 사람

김학종 목사님은
간암으로 강단에서 쓰러질 때까지
설교를 멈추지 않았다.

재수술 후
몸에 힘이 거의 남지 않았을 때도
가능한 한 강단에 섰다.

그분에게
목회는 직업이 아니었다.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생각 정리

1970년대를 중심으로
브라질 한인 사회에는
책임감과 사명감을 함께 지닌
목회자들이 존재했다.

영주권 문제와
생활의 불안이 공존하던 시절,
사람들은 믿음으로 버텼고
교회는 그 버팀의 중심에 있었다.

자신을 아끼지 않는
한 목회자의 삶이
한인 교계를 지탱하는
한 축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김학종 목사님의 이야기는
한 개인의 미담이 아니라,
한 시대가 어떻게 버텨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라
나는 생각한다.


이제 이민의 시간은
조금씩 다른 국면으로 들어선다.
낯섦 속에서 사람을 알아보고,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얼굴이 생기고,
조심스럽게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기기 시작한다.

다음 이야기에서는,
브라질 땅에서
친구가 생기고,
삶에 조금씩 여유가 스며들던 과정

기억 속에서 꺼내 보려 한다.

※ 이 글은 ‘브라질 한인 이민 50년’ 연재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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