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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이민 50년, 한 이민자의 삶을 돌아보다 - ⑦ 기다려지는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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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다른 모습이 되었지만,

저 빨간 건물은 1970년대 한인들이 모이던
‘궁전’이라는 식당이 있던 자리다.


브라질 이민 초기,
“오늘 하루를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할까”라는 생각은 사치였다.
밖으로 나가는 일은 제한이 아니라 금지에 가까웠고,
친구를 만나는 일은 꿈도 꾸지 못했다.
사실 초반에는 
친구를 사귈 틈조차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일요일이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특별한 계획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곳에 가면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바로 교회였다.


브라질에 처음 왔을 때
가장 막막했던 것은 언어였다.
한글과 알파벳은 출발선부터 달랐고,
14~15살이라는 나이는
새로운 언어에 완전히 적응하기엔 애매한 시기였다.

어르신들 가운데는
아예 언어를 내려놓은 분들도 많았다.
10년, 20년이 지나도
필요한 말만 겨우 하는 모습은
이민이 시간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임을 보여주었다.

낯선 땅에서의 작은 위로

다행히 브라질은
한인들이 자주 먹는 채소가 비교적 풍부했고,
쌀이 주식인 나라였다.
이런 배경에는
이 땅에 먼저 뿌리내린 일본 이민자들의 공이 컸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근면함 덕분에
같은 얼굴을 가진 한국인들 또한
현지 사회에서 비교적 좋은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반면,
모든 동양인이 일본인으로 보이는 시선 속에서
일본 사람으로 취급받는 불편함도 함께 존재했다.

브라질 현지인들의 성격은 전반적으로 느긋했다.
그들과 함께 일하던 한인들은
처음엔 많이 답답해했다.
모든 걸 빠르고 정확하게 해내는 데 익숙한 우리에게
그들의 방식은 쉽게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느림에도 장점이 있지 않나 생각하게 된다.
건강을 다루는 내 관점에서 보면,
이런 느긋함은 정신적·육체적 건강을
오히려 덜 해치기도 한다.


일요일이 되면
브라질의 일요일은 유난히 조용했다.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고,
도시는 잠시 숨을 고른다.

옛 한인촌이었던 Rua Conde de Sazeda 거리도
일요일이면 조용해졌다.
성당과 교회,
한인 마켓과 약국, 진료실이 모여 있던 그 거리의 낮 풍경은
위험이 잠시 멈춘 듯한
묘한 평온이 느껴지곤 했다.

그 조용한 거리의 끝과 중간중간에는
사람이 모이는 곳들이 있었다.
바로 한인 교회들이었다.

처음 느꼈던 거리감

브라질에 와서 처음 나간 교회는 연합교회였다.

하필 그날은 야외예배가 있는 날이었다.
주변을 보니 아이들이
포르투갈어로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 말들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아, 브라질이구나. 교회도…’
어디에도 끼지 못한 채 서 있었고,
관심을 가져주는 교사도 없었다.

그래서 첫 방문한 연합교회는
나에게 정감을 주는 공간이 되지 못했다.

그날 야외예배에서
기억에 남은 것은 딱 하나,
아이들이 나눠 주던 감자튀김이었다.

처음 맛본 그 감자튀김은
이상하게도 참 맛있었다.

며칠 뒤,
동생이 감자튀김을 발견했다며 사 왔고,
우리는 하루에 몇 개씩 먹었다.
그것이 브라질에서의 일요일,
나의 첫 ‘좋은 기억’이었다.

사람이 있던 교회

얼마 후 여삼춘 가족이 브라질로 오셨고,
우리는 가나안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그곳에는 한국말이 있었다.
작은 교회였지만 사람들이 있었다.
“이번 주도 보게 되는구나.”
그 인사는 그 시절 인사이자 위로였다.

교회에서 어른들은 삶의 정보를 나누었고,
목사님들은 새로 온 이민자들의 집을 직접 찾아다니며
정신적인 어려움을 위로하고,
초기 이민 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왔다.

초기 이민자들이 교회를 통해 받았던 도움 가운데에는
집을 구하기 위한 ‘보증인’ 문제도 있었다.

1981년 무렵 사면령이 내려
많은 이들이 영주권 문제를 해결했지만,
보증인이 없으면 집을 구하는 일은 여전히 어려웠다.

보증인은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문제가 생기면 모든 책임을 함께 져야 하는 자리였다.
그래서 선뜻 나서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며 신뢰를 쌓다가,
보증인이 생기자
어느 순간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교회는 외면하지 않았지만,
사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돌아서기도 했다.

그 시절의 교회는
따뜻함과,
따뜻함을 가장한 계산이
함께 공존하던 공간
이기도 했다.

의류 산업의 급성장과 함께
한인 교계 역시 놀라운 속도로 성장했다.
부흥회가 열릴 때마다
교회마다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그 모든 성장의 중심에는
늘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교회는,
이민자의 삶 속에서
단순한 종교 공간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살게 하던 자리였다.


교회는 완벽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을 외면하지는 않았다.


※ 다음 글에서는
이민 초기 교회 성장의 배경에 있었던
한 사람의 목회자,
김학종 목사님의 이야기를
기록해 보려 합니다.

※ 이 글은 ‘브라질 한인 이민 50년’ 연재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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