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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이민 50년, 한 이민자의 삶을 돌아보다 - ⑥ 살면서 보이기 시작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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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의 좋은 점, 그리고 다른 점

며칠 전, 한의원 앞에서.

오늘은 브라질에서 살며 시간이 흐른 뒤에야 보이기 시작한
좋은 점과 다른 점들을,
내가 겪은 생활의 기억 속에서 정리해 보려 한다.

지난 글들에서는 초기 농업이민 세대 이후,
1970년대 전후 브라질에 도착한 세대가 겪어야 했던
불안과 고통의 시간을 기록했다.

최근 들어 브라질인들의 미국 불법 이민이 급증했고,
체포·수감된 뒤 수갑을 찬 채
브라질로 추방되는 모습이 여러 차례 보도되었다.

그 장면들을 보며
40~50년 전 이 땅에서 같은 불안을 안고 살아야 했던
우리 한인들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겹쳐 떠올랐다.
그 고통을 알기에,
지금의 추방 과정이 조금 더 인간적이었으면
하는 마음도 함께 들었다.

미국은 오래전부터 ‘꿈의 나라’로 여겨졌지만,
돌이켜보면 당시의 브라질 또한
의외로 살아볼 수 있는 나라였다는 사실을
이곳에서 조금씩 알게 되었다.


집을 구한다는 것

브라질 이민 첫 한 달은
옛 한인촌이었던 Rua Conde de Sarzedas에서
오사장님 가족과 함께 방 하나를 쉐어하며 시작되었다.

영주권이 없으면 집을 구할 수 없었고,
영주권이 있어도 보증인과 신용이 필요했다.
집을 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민자에게는 큰 장벽이었다.

부모님은 그 거리가 살 곳이 아니라는 판단 아래
조금 떨어진 Rua Buenos de Andrade로 이사하셨다.
가정집이었고 방이 세 개라
형제들은 이층침대를 쓰며 지냈다.

그러나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다시 급히 이사를 해야 했다.
그 이유를 그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주변 봉제 가정에 대한 연방경찰 단속 때문이었다.


안전을 찾아 옮긴 Cambuci

다음으로 옮긴 곳은
Cambuci의 Rua Professor Camilo Bergenson 14번지였다.
어린 시절 집을 잃어버릴까 봐
아버지가 외우게 하신 긴 주소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그 집은 방이 다섯 개인 큰 집이었고
월세는 당시로서는 큰돈이었다.
그래서 집 일부는
영주권이 없는 다른 한인 가족들과 함께 쉐어했다.

임신한 몸으로 미싱을 돌리던 아주머니,
세 딸을 데리고 추방을 겪은 뒤
조용한 동네를 찾아온 어머니….
그 시절, 집을 함께 산다는 것은
서로에게 위안이자
버텨내기 위한 선택이었다.


브라질에서 좋았던 점들

학교 수업은 오전이면 끝났다.
45년이 지난 뒤에야 홍일이에게 물었다.
“그때 학교 끝나고 뭐 했냐”고.
홍일이는 집에서 아크릴 제품 만드는 일을 도왔다고 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머니가 수놓는 일을 하셔서
그 곁에서 자연스럽게 일을 거들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우리는 알고 있었다.
가족이 함께 노력해야
이 사회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설 수 있다는 것을.

이사한 동네의 거리는 깨끗했다.
쓰레기도 거의 보이지 않았고,
매일 아침 거리 청소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생활 인프라도 인상적이었다.
그 무렵 브라질에서는
칼라 TV가 막 출시되어 보급되기 시작한 시기였고,
한국에서는 여전히 흑백 TV만 보던 때였다.
조금 뒤에는 비디오도 가정에 들어왔는데,
한인들에게는 한국 드라마를 볼 수 있다는 이유로
비디오가 거의 필수품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항공 산업 역시 놀라운 부분이었다.
브라질은 내가 이민 오기 전부터 이미
중형 항공기를 제작해 수출하던 나라였다.

브라질의 항공산업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진행 중인 현실이다.

최근 대한민국 공군은
미국 록히드마틴의 C-130J 대신
브라질 항공기 C-390 수송기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산 수송기를 제치고 브라질 기종이 선정된 것은
가격 경쟁력뿐 아니라
기술 협력과 성능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자가용도 비교적 빨리 가질 수 있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브라질에서는
조금 더 열심히 노력하면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생활이었다.

슈하스까리아는
고기를 좋아하는 한국인들에게
말 그대로 특별한 공간이었다.

상파울로 주변에는
주말에 다녀올 수 있는
좋은 휴양도시와 넓은 해변도 많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사람들이었다.
길을 잃으면 모르는 사람도 데려다주고,
말이 통하지 않아도 도와주려 했던
브라질 사람들의 친절함은
브라질을 살며 느낀
가장 큰 장점이었다.


브라질은 완벽한 나라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분명,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들이 존재했다.
불안한 현실 속에서도
아이들은 학교에 다녔고,
가족은 함께 일하며 하루를 버텼다.
좋음과 다름이 뒤섞인 그 시간들은
이민자의 삶을 조금씩 단단하게 만들었다.

다음 글에서는,
이러한 삶의 흐름 속에서
브라질 한인교회들이 어떻게 성장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성장의 배경에는 어떤 선택과 이유들이 있었는지를
차분히 기록해 보려 한다.

※ 이 글은 ‘브라질 한인 이민 50년’ 연재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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