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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이민 50년, 한 이민자의 삶을 돌아보다 ⑤ 농업이민 이후, 우리는 왜 의류로 모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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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70년대 브라질 한인 이민의 현실과 영주권 문제,
그리고 의류산업이 형성될 수밖에 없었던 구조적 배경


5차에 걸친 브라질 정식 이민은
1963~1966년 농업이민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그 이후 브라질로 향한 이민은
더 이상 국가가 주도한 제도 속 이민이 아니라,
친인척의 소개, 소문, 개인의 결단에 의존한 형태로 이어졌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브라질 땅을 밟은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경로로 왔고,
어떤 이유로 이민을 결심했을까.

나는 오래전부터 진료실에서 만난 어르신들과의 대화를 통해
브라질 한인사회의 발전이
왜 의류산업 중심으로 형성될 수밖에 없었는지가 궁금해졌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농업이민 이후 브라질로 들어오신 분들께
늘 같은 질문을 던졌다.
브라질로 오게 된 경로, 이민의 이유, 하신 일,
그리고 영주권은 어떻게 해결하셨는지.


각기 달랐던 이민의 경로들

1964년, 농업이민이 아닌 자유이민 형태로 입국한 사례.
세 형제가 시어머니와 함께 두 달간 배를 타고 리오(Rio)에 도착했다.
이들은 당시 서울농장과 아리랑농장에 취직하며
영주권 문제를 해결했다.
(정태훈님·정희복님과의 대화, 당시 연세 80~90대 – 2021년 기록)

1965년, 볼리비아 이민을 목표로 떠났던 한 가족은
부산–오키나와–홍콩–싱가포르–아프리카를 거쳐
리오(Rio)에 도착했다.
홍콩에서 경유비자를 받아 그대로 브라질에 안착한 경우였다.
브로커에게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붓고도
3년간 영주권을 해결하지 못했으나,
브라질에서 막내가 태어나며
가족 모두 영주권을 취득하게 되었다.
(당시 14세였던 당사자의 증언 – 2021년 기록)

1969년, 파라과이 1차 이민 후
아르헨티나를 거쳐 다시 브라질로 이주한
구달서·유점순 부부.
사업 투자 이민으로 영주권을 해결했으나,
정부 규제로 사업은 중단되었고
결과적으로 큰 손실만 남았다.
(2021년 기록)



1960~70년대 브라질 항구.
농업이민 이후, 각기 다른 경로로 브라질에 도착하던
한인 이민자들의 시대적 배경을 보여주는 장면.
AI 생성 이미지


이민 붐의 이면에 있었던 부모 세대의 판단

1970년에 브라질에 이민 온 서홍일 변호사는
브라질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같은 반,
같은 책상에서 5년간 함께 보낸 친구인데 
그래서 홍일이에게 브라질 이민의 이유를 물었다.

그 출발점은 브라질로 선교를 떠났던
부산 수정교회 목사의 전화였다고 한다.

그 선교사는 할머니에게
“브라질은 전쟁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나라”라며
이민을 권유했고,
결국 할머니의 결단으로 가족의 이민이 이루어졌다.

당시는 6·25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베트남 전쟁까지 겹치며
사회 전반에 불안이 짙게 깔려 있던 시기였다.
외아들을 둔 어른의 선택은
기회라기보다 안전을 향한 판단에 가까웠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아버지가 늘 하시던 말이 떠올랐다.
“너희들 때문에 이민 왔다.”

나의 아버지와 함께 이민을 결심했던 여주호 삼촌은
모두 6·25 전쟁 참전용사였고,
여주호 삼촌은 베트남 전쟁에도 참가했다.
전쟁을 피한 사람들이 아니라,
전쟁을 직접 겪고 감당했던 사람들이었다.
나라가 요구한 책임을 외면하지 않았기에,
전쟁의 참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자녀 세대에게만큼은
같은 불안과 기억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며
늘 같은 말을 반복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버지가 “너희들 때문에 이민 왔다”는 말을
수없이 들으면서도
그 의미가 전혀 와 닿지 않았다.

왜 우리들 때문에?
여기가 정말 더 나은 곳이었을까?
속으로는 이런 의문이 들었지만,
한 번도 그 말의 이유를 더 묻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이민 온 친구 서홍일 변호사의 이야기를 통해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이민은 개인의 도피가 아니라,
전쟁을 경험한 부모 세대가
자녀를 위해 내린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아버지가 늘 하시던 말씀의 의미가
비로소 이해되었다.



6·25 전쟁 참전 당시 수여된 무공훈장.
전쟁을 겪은 부모 세대의 선택을 보여주는 기록.

영주권 없는 현실, 그리고 의류산업

농업이민은 끝났지만
브라질은 점차 살기 좋은 나라로 한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인식은
농업이민자에게 주어진 영주권이라는 틀 안에서만
가능했던 이야기였다.

영주권이 없으면
운전면허도, 집 계약도, 사업도 할 수 없는 사회였다.
모든 것은 남의 이름으로,
모든 거래는 현찰로 해야 했다.

이 조건들이 맞물리며
브라질 한인사회는
고용주와 고용인의 구조 속에서
의류산업을 중심으로 급속히 성장하게 된다.

이것은 누군가의 탁월한 선택 때문이 아니라,
그 시대, 그 제도, 그 현실이 만들어낸
필연적인 결과였다.


이 글은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평가하기 위한 글이 아닙니다.
1960~70년대 브라질로 이민을 선택했던 한인들의
실제 경험과 증언을 바탕으로,
그 시대 이민의 배경과 구조를 기록하기 위해 작성되었습니다.

등장하는 인물과 사례는 모두 실제 경험에 근거하며,
개인에 따라 시기, 경로, 상황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다음 이야기 예고
다음 편에서는 도착 초기에 겪었던 어려움과 함께,
브라질에서 느꼈던 좋았던 점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야 이해하게 된
부모 세대의 선택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 이 글은 ‘브라질 한인 이민 50년’ 연재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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