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이민 50년, 한 이민자의 삶을 돌아보다 – ④ 브라질 국경에서, 이름 없이 사람을 살린 한국인
[70년대] 국경에서 만난 착한 한국인
1976년 이민 오신 (고) 유정길 선생님 이야기
브라질 국경에는, 이름 없이 사람을 살린 한국인이 있었습니다.
※ 위 이미지는 당시 상황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인공지능(AI)이 생성한 참고 이미지입니다.
브라질 국경을 넘을 당시,
돈 한 푼 받지 않고 심지어 사례조차 극구 거절하며
도움을 준 한국인이 있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분은 당시 Ponta Porã에 거주하시던 분이었고,
그 사연이 너무 따뜻해 당시 운영하던 한브네트에 글로 남긴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글을 올린 바로 다음 날,
이야기의 주인공이셨던 분의 따님에게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분의 성함은 유정길 선생님이었습니다.
파라과이에 남기로 한 이유
1976년, 유정길 선생님 가족은 파라과이로 이민을 갔지만
다른 많은 분들처럼 곧바로 브라질로 향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선생님의 부친은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쫓겨났던 기억 때문에,
영주권 없이 자녀들과 살아야 하는 삶을 원치 않으셨다고 합니다.
처음 정착한 Asuncion은 기후가 너무 더워
Pedro Juan Caballero로 이주하였고,
이후 브라질 사면령을 통해 영주권을 취득했지만
가족은 계속 Ponta Porã에 거주하셨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갑자기 몰려오기 시작했어요”
유정길 선생님의 따님 Veronica 님은 이렇게 회고합니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갑자기 많이 찾아오기 시작했어요.
도움을 요청하러 말이에요.”
남을 돕는 것을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찾아오는 분들에게 방을 내주고 재우며,
주말까지 먹이고 쉰 뒤 국경을 넘도록 도와주셨다고 합니다.
자가용 위에는 낚시 도구를 싣고,
연방경찰의 눈을 피해 조용히 국경을 넘겼다고 합니다.
“당신이 브로커인 줄 알았습니다…”
한 번은 국경을 넘던 사람들 중
한 가족이 긴장으로 실패해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 남성은 자신이 목사라고 밝히며
유정길 선생님의 두 손을 꼭 잡고 울며 말했습니다.
“아무 대가도 받지 않으시기에
저는 아저씨가 국경 브로커인 줄 알았습니다…”
안정제를 드신 뒤 며칠 후,
그 목사님 가족은 다시 시도했고 무사히 국경을 넘었습니다.
새벽마다 들리던 “한국 사람 집 맞나요?”
Veronica 님은 새벽마다 찾아오던 사람들로 인한 기억도 떠올립니다.
소문을 듣고 왔다며 길가에서 큰 소리로
“한국 사람 집이냐”고 부르던 분들 때문에
어린 시절 창피했던 기억도 남아 있다고 합니다.
당시 이 지역 국경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둔 생활권이었고,
오래 거주하며 쌓인 신뢰 덕분에
아버지가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던 것 같다고 회상합니다.
남겨진 것은 ‘사람을 살린 기억’
“아버지는 많이 힘드셨겠지만,
저희 아이들에게는 사람을 돕는 기억을 남겨주셨어요.”
유정길 선생님은
1990년,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 위 사진은 유정길 선생님 가족의 실제 사진으로,
따님 Veronica 님이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촬영한 모습입니다.
시대적 배경 (요약)
70~80년대 초, 브라질 사면령 이전에는
많은 한인들이 파라과이 국경을 통해
두려움 속에서 브라질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시대를 아는 사람들에게
(고) 유정길 선생님은,
두려운 국경에서 조용히 손을 내밀어 준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글은 1970~80년대, 두려움 속에서 브라질 국경을 넘던 한인들의 현실 속에서
아무 대가 없이 사람을 도왔던 한 한국인의 이야기를 기록한 글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왜 브라질 한인사회가 의류업을 중심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는지,
영주권 없는 삶이라는 현실 속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길이
결국 우리 한인사회의 의류업 성장으로 이어지게 된 과정을 기록해 보려 합니다.
1970년대 브라질, 영주권 없이 살아야 했던 한인 여성의 기록
💢 나쁜 한인
※ 본 이미지는 실제 인물을 재현한 것이 아닌,
당시의 분위기를 전달하기 위해 인공지능(AI)으로 생성된 이미지입니다.
특정 개인을 떠올리게 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1976년, 미스 Kim은 어머니와 오빠 가족과 함께 파라과이를 거쳐 브라질로 들어왔다. 당시 그녀는 스물일곱 살의 미혼 여성이었다.
1970년대 중반은 해외 이민이 유행하던 시기였지만, 브라질 직접 이민은 이미 중단된 상태였다. 브라질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파라과이로 이민 수속을 한 뒤 다시 브라질로 입국해야 했는데, 이런 사실은 대부분 비자를 발급받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브라질로 가기 싫어했던 미스 Kim은 오빠의 강한 권유로 어쩔 수 없이 이민길에 올랐다. 그러나 도착 후, 영주권 없이 살아야 하는 현실을 알게 되자 오빠 가족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해 6개월 만에 스페인으로 재이주했다.
미스 Kim은 어머니와 함께 잠시 브라질에 남아 일을 하며 돈을 모아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다. 당시 봉제와 자수 같은 수공업으로 벌 수 있는 수입은 생각보다 컸기 때문이다.
그 시절 영주권이 없는 한인들은 대부분 봉제나 자수 같은 가내수공업에 종사했다. 외출 중 경찰에 체포되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다.
일을 할 때는 창문을 꼭 닫았고, 경찰이 떴다는 소문이 돌면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영주권이 없는 한인들을 고발해 돈을 벌던 김WB라는 한인 남성이 있었다. 그는 체포된 한인들의 통역을 맡으며 신상 정보를 확보했고, 이를 이용해 밀고를 했다고 전해진다.
어느 날, 집 앞을 서성이는 수상한 남성을 본 날, 미스 Kim의 집에는 한인 가정집을 돌며 미용 일을 하던 아주머니가 점심을 먹으러 들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들이닥쳤고, 한인 여성 세 명은 사이렌을 울리는 경찰차에 태워져 연행되었다.
경찰서에는 이미 많은 한인들이 잡혀와 있었고, 조사 과정에서 통역을 맡은 사람이 바로 김WB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연고도, 도와줄 사람도 없다는 이유로 미스 Kim 모녀는 조사 순서에서 밀려났고, 결국 이유도 모른 채 장기간 구금되었다.
한 달이 넘도록 면회 오는 사람 하나 없이 감방에 남아 있던 어느 날, 브라질 죄수 한 명이 손짓으로 “어머니가 울고 있다”고 알려주었다고 한다.
브라질로 가기 싫다던 딸을 데리고 온 어머니는 스물일곱 살 딸의 처참한 현실 앞에서 감옥 안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미스 Kim은 억울함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감옥 안에서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난리를 쳤고, 교도소 측은 혹시 자해라도 할까 봐 끈이나 줄 같은 것들을 모두 치웠다고 한다.
얼마 후, 당시 한인교회를 세운 김승만 목사가 이들을 찾아왔다. 미스 Kim이 이미 파라과이로 떠난 줄 알고 있던 목사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크게 놀랐다고 한다.
이후 모녀는 연방경찰서로 이송되었고, 다시 봉헤찌로 인근의 감옥으로 옮겨졌다. 지하에 위치한 그 감옥은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곳이었고, 미스 Kim은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고 회상했다.
다행히 한인 남성 한 명이 찾아와 곧 추방될 것이라 알려주며 성경책과 음식을 전해주었다. 그는 가라오케에서 싸움에 휘말려 수감된 사람이었다고 한다.
지금 돌아보면, 당시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한인들이 경찰에 잡혀갔고, 일부 경찰들은 이를 이용해 부당한 이익을 챙기기도 했다.
어제, 2026년 1월 12일.
한의원을 찾은 한 중년 여성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런 말을 들었다.
“우리 아저씨도 한~두 달 감옥에 있었어요.”
그분은 이어서, 당시 한인들을 밀고하던 사람의 이름으로 김WB를 정확히 언급했다.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아픈 기억을 남긴 사람의 이름은 쉽게 잊히지 않는 듯했다.
1970년대 중반, 영주권 없는 한인들에게 경찰은 공포 그 자체였다.
- 경찰을 보면 얼굴도 마주치지 못하고 도망쳤다.
- 공중전화 하나 쓰러 나갔다가 체포되어 추방된 이도 있었다.
- 두 차례 체포 이후, 고개를 자주 뒤로 돌리는 버릇이 생긴 사람도 있었다.
- 추방 후 다시 밀입국을 시도하다 세 번이나 잡힌 이도 있었다.
- 열세 살 소녀는 교통사고 후에도 경찰이 두려워 집으로 도망쳤다.
- 체포 후 추방된 가족이 우리 집으로 와 한동안 함께 살기도 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떠나온 브라질 이민의 하루하루는, 때로는 우리 한인들에게 지옥 같은 날이었다.
내 옆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잡혀갔다.
친구들의 아버지, 또 다른 친구들의 어머니들….
이런 체포는 연중행사처럼 반복되었고,
영주권 없는 삶은 곧 두려움의 삶이었다.
이 기록은 누군가를 다시 아프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시대를 지나온 이들의 삶이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남긴 것이다.
다음 글에서는,
영주권 없이 국경을 통과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낯선 한인들의 길을 묵묵히 도와주었던
한 ‘좋은 한국인’의 이야기를 기록해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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