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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이민 50년, 한 이민자의 삶을 돌아보다 – ⑮ 온라인에서 만난 인연들, 그리고 도움의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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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로운 문명 속에서 만난 첫 친구 모뎀 소리로 세상과 연결되던 시절, 인연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AI가 만든 이미지) 사람은 태어나 서로 만나게 되며 사귀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새로운 문명의 변화로 인해 또 다른 친구들을 사귈 수 있게 된다. 나 역시 그랬다. 브라질에서 인터넷이 시작되며 모뎀으로 접속하던 때, 여러 친구들 중 좋은 친구를 하나 만나게 되었다. 컴퓨터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할 때… 아마 1998년 정도 되지 않나 싶다. 좋은 글, 감동 글을 찾아다니다가  Daum 에서 만난 운영자분. 얼굴도 모르지만 글을 너무 잘 쓰고 말도 조리 있게 하셔서 호감이 가 꼬셨다 ㅎㅎ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넷 상에서도 유명한 여성 시인이었다. 송XX, 시인이자 화가였던 이 분은 항상 내가 필요할 때 필요한 동영상이나 그림을 만들어 주셨다. 나에게는 지금의 AI(인공지능) 같은 분이셨다. 자그만치 20년 넘게 우리는 가까운 친구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실크로드라는 희귀불치병으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때도 있는 이 분은 브라질 한인사회를 20년 이상 지켜보았고, 또 브라질 한인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나를 도와 한인사회에 도움을 주신 분이시기도 하다. 필요할 때만 내가 찾았는데… 지금은 건강히 잘 계시는지, 좀 전 안부 메일을 보냈는데 한메일이 더 이상 되질 않는다. ㅠㅠ 2. 포어 강의가 시작되다 – 남미로닷컴 이후 온라인 상에서 또 다른 친구 하나가 생겼다. 한인닷컴이  남미로닷컴 으로 넘어간 후, 그곳에서 만난 친구다. 한인닷컴부터 남미로닷컴까지, 한인들의 가장 큰 이슈는 늘 영주권 문제였다. (그 다음에 하나로가 있었는데, 그곳에서도 가장 중요한 주제는 역시 영주권이었다) 나는 늘 익명으로 글을 썼는데, 어느 날 한 사람이 포어를 가르쳐 달라고 하더니 여러 명이 동시에 포어를 가르쳐 달라고 말한다. 엥, 포어?? 포어는 나와는 거리가 멀고 자신도 없는데? 나도 하기 힘든 포어를 누굴 가르치나 싶어 거절했지만, 기...

브라질 이민 50년, 한 이민자의 삶을 돌아보다 ― ㉓ 결단을 미룬 공동체 (글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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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제13회 한국문화의 날. 한인복지회를 포함해 한인사회는 이미 현장에서 함께 움직여 왔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이 힘을 지속시키는 구조다. 쓰이지 않는 한인회 건물, 감당 못 하는 복지회 건물 한인회에는 ‘한인회관’이라는 건물이 있다. 그러나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 아끌리마썽에 세워진 이 건물은 수십 년 동안 사실상 비어 있었고, 지금의 한인 생활권과도 완전히 멀어진 공간이 되었다. 한인회 이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브라질 한인은 없다. 그럼에도 왜 아무 변화가 없었는가. 과거의 공로와 정서가 판단을 막았고, 그 사이 한인회는 탄탄한 중심 기능을 갖지 못했다. 지금도 한인회 회의는 회관이 아닌 식당이나 임시 공간에서 열린다. 한인회 건물은 있지만, 한인회는 그 안에 없다. 상징을 남기는 것이 중요한가, 아니면 새로운 한인들과 젊은 세대의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중요한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오랫동안 결단을 미뤄 왔다. 한인복지회도 다르지 않다. 국수공장이던 대형 건물을 9년간 고쳐 사용해 왔지만, 노후한 구조는 끊임없는 보수비를 요구한다. 봉사 첫날 눈에 띄게 지저분했던 환경, 개인 비용으로 페인트와 커튼을 교체해야 했던 현실은 이 공간이  시스템이 아닌 개인의 헌신으로 유지되어 왔음 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제는 분명히 한계를 넘었다. 자원은 있다, 그러나 묶이지 않았다 한인회에는 건물이 있고, 한인복지회에는 건물과 함께 OSCIP라는 강력한 제도가 있으며, 노인회에는 건립을 위해 비축된 자금이 있다. 우리는 없어서 못 하는 것이 아니다. 각자 따로 움직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특히 한인복지회는 기업 후원을 세금 공제로 연결할 수 있는 제도를 가지고 있음에도, 공간과 구조가 분산되어 실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의 구조에서는 아무리 좋은 자원도 흩어질 수밖에 없다. 의료봉사는 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를 움직이지 못한다 의료봉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

브라질 이민 50년, 한 이민자의 삶을 돌아보다 ― ㉒ 잊고 있던 이야기들, 재정과 봉사의 갈림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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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두 노인회의 이야기를 올리고, 마지막으로 결론의 글과 해결방안의 글 두 편을 올리며 끝을 맺으려 했었다. 그런데 문득, 잊고 지나간 이야기 몇 가지가 있어 이렇게 정리해 올려본다. 15년 전에는 일을 하면서 무엇이 시작이었고, 무엇이 중간이며, 무엇이 마지막이었는지 기억이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글을 쓰기 위해 예전 자료들을 다시 살펴보며 그 흐름을 비교적 정확히 알게 되었다. 1. 한인회에 들어가게 된 이유 – 재정 확보 서주일 회장이 나를 한인회로 불러들인 가장 큰 목적은 재정 확보와 관련된 일이었다. 당시 나에게는 브라질에 사는 한인 청소년들이 어떻게 하면 긍지를 가질 수 있을지, 또 어떤 방식으로 노인분들을 위한 봉사를 자발적으로 이어갈 수 있을지에 대한 두 가지 고민이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재정 확보를 위한 한 가지 방법을 제안했고, 그 방법은 “다른 사람은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결국 나를 한인회에 앉히는 계기가 되었다. 그 아이디어는 바로 효과를 보았고, 많은 한인들이 자발적으로 1년 치 한인회비를 납부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2년간 약 500명 × 350헤알 × 2 = 약 350,000헤알) 이때 처음으로, ‘의지만 있으면 한인사회도 충분히 움직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2. 한인회보와 사이트들, 그리고 감당하기 어려운 확장 이후 한인회보를 만드는 과정에서 유대인 봉사단체 Unibes를 취재하게 되었고, 그들의 활동이 인상 깊다는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한 사람이 “사이트를 만들어 주겠다”고 나섰다. 며칠 뒤, 실제로 사이트 하나가 만들어졌고 그 일을 계기로 상황은 급격히 달라졌다. 한인회 재정을 위한 ‘한인지정업소’ 프로그램, 매달 발간해야 했던 한인회보, 한인회 홈페이지, 꼬레아닷컴, 양지노인회 블로그와 어머니 합창단 블로그까지. 일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이미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한인업소록 제작 요청이 이어졌고, 브라질 한인 인구조사, 이른바 ‘한인 센서’ 제...

브라질 이민 50년, 한 이민자의 삶을 돌아보다 ― ㉑ 조심스럽게 남기는 기록, 봉헤찌로의 두 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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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I 생성 이미지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남겨야 할 이야기 사실 노인회에 대해서 글을 쓰는 것은 늘 조심스럽습니다. 어르신들이 다 보통 분들이 아니시기에… 겪어본 사람만이 압니다. (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용을 쓰고 나면 그다음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기에 오늘은 이 글을 올려봅니다. 서주일 한인회장이 한인회에 있을 당시, 봉헤찌로에는  양지노인회 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한인회보 안에 넣을 기사와 함께 한인 단체에 대한 동정을 알기 위해 Rua Correia de Melo 77번지 아파트 11호를 방문했습니다. “조그만 살라 하나에…” 양지노인회와 기록의 시간 방문한 양지노인회는 계단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어르신들이 오르내리기에는 조금 많아 보이는 계단을 올라가니, 조그만 살라 하나, 조그만 방 두 개, 조그만 부엌이 나옵니다. 그 안에 15명~20명 가량의 어르신들이 계셨고, 모두 식사 중이셨습니다. 양지노인회를 맡고 계신 유경렬 어르신은 등록된 분들이 43명이고, 매일 20명 정도의 어르신들이 점심과 간식을 드시며 여가를 보내신다고 하셨습니다. 당시 정목사님의 부인이신 이상례 사모님께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식사를 챙기시고, 간호사이셔서 아프신 곳도 봐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토요일에는 홍선영이라는 분이 하루를 도우신다고도 하셨고요. 한인회가 회보를 만든다는 소식이 양지노인회 유회장님 귀에 들어갔나 봅니다. “우리도 회보를 만들겠다”며 비용을 알아봐 달라고 하셨고, 비용을 알려드리자 이번에는 회보를 만들겠다고 하시며 그 안에 좋은 내용의 글과 함께 저에게 한방 칼럼도 써 달라고 하십니다. 아… 이 무슨 날벼락같은 일이 ㅜ-ㅠ 유회장님 성격을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ㅎㅎ 이분이 마음먹으면 일이 커지는 스타일이라 솔직히 거절이라는 선택지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유회장님은 제가 존경하는 김학종 목사님의 오랜 친구분이셨고, 개인적으로도 오래 알고 지내온 분이셨습니다. 다행히 저와는 사돈 관계이기도 해서 다른 분들께 하시던 것보다는 저...

브라질 이민 50년, 한 이민자의 삶을 돌아보다 ― ⑳ 한인복지회에서 본 봉사와 구조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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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을 시작하며 이 글은 한인복지회를 평가하거나 비판하기 위한 글이 아니다. 15년 이상 직접 관여하며 보고 겪은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개인적 증언이며, 해법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이어가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판단이나 결론보다, 사실과 체감한 현실만을 담고자 한다. 2010년 촬영한 한인복지회 건물 외관 – Rua Hipódromo, Brás 우연처럼 시작된 한인복지회와의 인연 한인복지회를 알게 된 것은 서주일 회장이 막무가내로 나를 임원으로 만들면서부터였다. 한인회보를 만들고 싶지만 제작 비용 문제로 주춤하던 시점에 “ 그냥 우리가 만들면 되죠 ”라고 했던 나의 말 한마디가 결국 일을 떠맡게 된 시작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것은 내 인생의 큰 실수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그때는 미처 몰랐다. 생각과 말은 반드시 시간을 두고 해야 한다는 것을 , 그 후에야 깨달았다고 해야 할까. 한의원을 운영하며 매달 한인회보를 제작하는 일은 신체적 피로보다 정신적 피로가 수십 배 더 컸다. 임원 중 절반은 이메일조차 제대로 사용하지 못해 각종 자료를 직접 종이로 받아 정리해야 했고,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마 지금도 서주일 박사는 그 시기 내 상황이 어땠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모두가 정신없이 바빴으니까. 밥을 사도 수십 번은 사야 할 상황이었지만 아직까지 한 번도 안 산 걸 보면, 역시 몰랐던 게다. (웃음) 한인복지회의 모습과 시간이 남긴 현실 한인회보를 채우기 위해 방문한 곳 중 하나가 한인복지회였다. 2010년 9월 25일, 어린이날 행사가 함께 열리던 날이었고 생각보다 훨씬 큰 규모의 건물이 인상적이었다. 당시 기록을 정리해 보면, 한인복지회는 Rua Hipodromo, 125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김정한 씨가 국수공장 매입 후, 전면 500㎡(10m × 50m) 규모의 건물을 기증했고 주성건 씨가 9년에 걸친 개조를 통해 총 건축면적 1,406.77㎡의 건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한인복지...

브라질 이민 50년, 한 이민자의 삶을 돌아보다 – ⑲ 총영사관, 한 사람의 선택이 남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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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질 이민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 총영사관 브라질 이민사를 이야기할 때 총영사관은 빠질 수 없는 존재다. 한·브라질 외교관계 수립 이후 거의 60년 가까이 총영사관은 늘 그 자리에 있었고, 이민자들의 삶과 함께 기쁨과 불편함을 동시에 안겨 준 공간이기도 했다. 이민 초기의 기억, 그리고 변화 이민 초기, 총영사관에 대한 기억은 솔직히 좋지 않았다. 한두 차례 방문했던 당시의 기억 속 총영사관은 ‘불친절’이라는 말이 먼저 떠오를 만큼 부담스러운 곳이었다. 영사관에 다녀오면 기분이 상했다는 교민들의 이야기도 흔했다. 지금 돌아보면 영사들이라기보다는 현지에서 근무하던 직원들의 응대 문제였고, 이는 결국 조직 차원의 교육과 시스템 부족에서 비롯된 일이었을 것이다. 약 30년 전부터 총영사관의 분위기는 점차 달라지기 시작했다. 교민들을 대하는 태도도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고, 전반적인 서비스 역시 나아졌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러한 변화는 부임하는 총영사에 따라 여전히 차이가 있었다는 점도 사실이다. 같은 한민족, 다른 거리감 2000년 이후 삼성, LG 등 한국 기업 주재원 가족들을 치료하며 의외의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교포들을 조심하라”는 지침을 받고 왔다는 것이다. 브라질 교포들은 대체로 정이 많고 친절한 편인데, 서로를 경계하며 거리를 두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이민자, 공관원, 주재원 모두 같은 한민족으로 해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지만, 서로 다른 시선으로 살아가는 현실이 아쉽게 느껴졌다. 총영사관의 역할과 현실 상파울루 파울리스타에 위치한 주브라질 한국 총영사관이 입주한 건물. 총영사관의 공식 임무는 대한민국 국민 보호, 영사 서비스 제공, 기업 진출 지원과 문화 홍보, 한인사회 지원이다. 그러나 실제로 브라질에서는 오랫동안 한인 동포 지원이 크게 체감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 이유를 들어보면, 초기 한인사회가 스스로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었고 그 관행이 굳어졌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따른다.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더 실감난...

브라질 이민 50년, 한 이민자의 삶을 돌아보다 – ⑱ 교회는 있었지만, 본은 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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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질 이민 사회와 한인 교회에 대한 기록 우리나라 대한민국 사람들이 해외로 나가면, 다른 민족과는 달리 비교적 빠른 성장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브라질 역시 예외는 아니었고, 한인들의 발전은 유독 두드러진 편이었다. 이태리인과 유대인, 아랍인이 주름잡던 브라질의 의류 상권에서 한인들은 빠른 속도로 정착하고 성장해 나갔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현지 종업원들과의 갈등도 적지 않게 발생했다. 그 중심에는 한인 특유의 급한 성격과 언어의 장벽이 있었다. 이러한 ‘급함’은 전쟁 이후의 압축 성장에서 비롯된 것인지, 수천 년 외세 침략 속에서 늘 깨어 있어야 했던 역사적 경험 때문인지, 아니면 타고난 기질의 문제인지 쉽게 단정할 수는 없다. 이는 개인적으로 한국인의 성향을 돌아보며 던져본 질문일 뿐이다. 다만 이러한 성향과 언어 장벽으로 인한 소통의 단절은 브라질 현지인들에게 “한인들은 돈 벌어서 떠날 사람들”이라는 인식을 남겼다. 실제로 많은 한인들이 수십 년의 삶 속에 미국으로 떠나거나 한국으로 역이민을 선택했다. 그 이유는 영주권 문제와 치안이 컸지만, 현지인들이 그런 사정을 알 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인들은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왔고 그 중심에는 늘 한인 교회가 있었다. 이민 초기 목회자들은 우리가 이 땅에 발을 디딘 이유가 우리만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살아갈 이 땅의 아픈 이웃을 외면하지 않기 위함이라는 신념 아래 교회를 세웠다. 내가 있던 교회는 상파울루에 있던 유명한 감옥소 Carandiru의 수감자들을 돌보는 사역도 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특정 교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많은 한인 교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이웃을 돕던 당시의 모습이기도 했다. 연합교회와 한인교회는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우범지역을 떠나지 않으며 주변 현지인들을 돌보는 역할을 감당해 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과연 그 선택이 옳았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답하기 어렵다. 실제로 지난 수십 년간 많은 한...

브라질 이민 50년, 한 이민자의 삶을 돌아보다 – ⑰ 위험한 도시에서, 사람이 남긴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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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상파울루에서 한 시간, 쟌지라는 어떤 도시인가 2011년, 쟌지라 선교 현장. 당시 아이들과 함께했던 시간의 기록 쟌지라는 상파울루 중심에서 약 40km 떨어진 외곽 도시다. 차로 이동하면 한 시간 남짓 걸리지만, 이 도시는 오래전부터 범죄와 마약 문제로 악명이 높았던 지역 이다. 특히 2010년에는  현직 시장이 살해되는 사건 까지 발생하며 쟌지라는 ‘위험한 도시’라는 인식이 브라질 사회 전반에 각인되었다. 이 지역의 많은 청소년들은 어릴 때부터 범죄와 마약을 일상처럼 접하며 성장하고 있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선교와 사회 사역을 시작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2. 출석 0명, 선교의 민낯 임현조 선교사님은 1997년 브라질로 파송되어 1999년 가족과 함께  Jandira 에 정착했다. 가정 뒷마당에서 교회를 개척하며 예배를 드렸지만, 개척 예배 이후 곧바로 맞닥뜨린 현실은  ‘출석 0명’  이었다. 선교를 하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일 것이라는 기대는 이 도시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쟌지라는 그렇게 선교의 현실을 먼저 보여주었다. 3. 사람을 통해 열렸던 길 전환점은 뜻밖의  사람 을 통해 찾아왔다. 현지인 목공업자 Farias의 소개로 미국·캐나다 출신 선교사 부부와 동역하게 되면서 교회는 정착의 계기를 맞게 된다. 아더 목사는 6·25 전쟁 당시 한국에서 군 복무를 했고, 이후 전쟁 고아와 가난한 이들을 돌보며 교회를 세워온 인물이었다. 그 부부는 브라질에서도 수십 년간 빈민 지역 아이들에게 영어와 음악을 가르치며 아이들의 시야를 넓혀 주는 사역을 이어오고 있었다. 4. 고아원을 꿈꾸되, 현실을 외면하지 않다 임 선교사님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아이들 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브라질의 현실은 한국과 전혀 달랐다. 한국은 6·25 전쟁 이후 수많은 고아가 생기며 ‘고아원’이라는 제도가 사회 안에 자리 잡았다. 반면 브라질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의 고아원이 거의...

브라질 이민 50년, 한 이민자의 삶을 돌아보다 – ⑯ 웃음으로 문을 열어 준 곳 ― 작은 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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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8월 23일 토요일 오후, 작은 예수회를 가다 2024년 4월, 대구 앞산전망대의 수녀님 사진  2014년 8월 23일 토요일 오후, 나는 봉헤찌로에 있는 ** 작은 예수회 **를 방문했다. 전화를 드렸더니 “언제든지 오시면 돼요” 하고 웃으며 말씀해 주신 분은, 최근 새로 오셨다는  정미영 테레자(Tereza) 수녀님 이었다. “언제든 오면 된다”는 이 한마디. 참 낯설면서도 감사하게 들렸다. 왜냐하면 과거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 자신의 공간과 시간을 지켜온 곳, 그래서 3년이 걸렸다 2010년 5월, 한인회보에 작은 예수회를 소개한 적이 있다. 당시 작은 예수회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브라질 땅에서 현지인들을 위해 봉사하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름과 주소를 소개 차원에서 올렸던 기억이다. 이후 직접 방문해 혹시라도 더 도울 일이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드려 방문 날짜를 상의했지만, 주말 외에는 시간이 어려운 나에게 돌아온 답은 단호했다.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은 방문이 안 됩니다.” 당시 작은 예수회를 맡고 계시던 원장 수녀님의 말이었다. 이후 한 번 더 전화를 드렸지만 결과는 같았고,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더 이상 전화를 하지 않으려 했는데, 이번에는 테레자 수녀님과 인연이 닿았는지 생각보다 쉽게 방문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테레자 수녀님의 첫인상은 웃음과 평안 그 자체였다. 작은 예수회 안뜰에 있는 예수님 동상의 얼굴이 수녀님과 닮아 보였던 것은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내 마음이 그렇게 보이게 한 것일까. ❖ 조용히 이어지고 있던 돌봄의 현장 당시 브라질의 작은 예수회는 65세 이상, 연고 없는 어르신들을 위한 무료 양로원 을 운영하고 있었고 행려인들에게 아침과 점심을 무료로 제공 하고 있었다. 작은 예수회는 거리에서 행려인들을 맞지 않았다. 안에 있는 큰 식당으로 모셔 차분하게 식사를 대접하고 있었다. “예수님을 대접하는 마음으로 합니다.” 수녀님의 이 말은 그저 말로만 들리지 않았다. 이...

브라질 이민 50년, 한 이민자의 삶을 돌아보다 – ⑭ 한 사람의 선택이 만든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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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이민 50년을 살며, 한 권의 책에서 마주한 역사 브라질 이민 50년을 살며 나는 브라질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을 지켜보아 왔다. 그중 하나는  마리아 수녀회를 방문한 뒤에야 비로소 제대로 이해하게 된 이야기 다.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다 마리아 수녀회를 방문하고 돌아오며 수녀님 한 분이 조용히 책 한 권을 건네주셨다. 제목은 『마리아 수녀회 40년사』. 두툼한 책이었고, 솔직히 처음에는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다 헤아릴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몇 장을 넘기기도 전에 책을 덮을 수 없었다. 그 안에는 내가 알지 못했던, 그러나 반드시 기록되어야 할 이야기들이 차분히 정리되어 있었다. ‘영화숙’이라는 이름 책 속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단어는 ‘영화숙’이었다. 처음에는 오래된 시설 이름쯤으로 여겼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 이름이 지닌 무게를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17년 전, 이해하지 못했던 한 이야기 그때 문득 오래전 한 어르신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약 17년 전, 알파빌리에 거주하던 연세가 여든을 훌쩍 넘긴 한 어르신이 자신이 젊은 시절 ‘영화숙’을 관리하던 사람이었다고 담담히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치료가 끝난 뒤 인터넷을 통해 여러 차례 찾아보았지만 관련된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고, 그 이야기는 그렇게 내 기억 속에 조용히 묻혀 있었다. 그런데, 이게 사실이었다 수녀님이 건네주신 『마리아 수녀회 40년사』 속에서 다시 ‘영화숙’이라는 이름을 마주하는 순간, 그때 들었던 그 어르신의 말이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이것은 사실이었다. 지금도 ‘영화숙’에 대한 기록은 단편적으로만 남아 있다. 일부 인권유린에 대한 언급은 있으나, 전쟁 직후 한국에 들어온 한 신부와 수녀들의 선택이 아이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한 신부의 선택 이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는  소 알로이시오 몬시뇰 신부 가 있었다. 말도 통하지 않고, 문화와 생활 방식도 전혀 다른 나라...

브라질 이민 50년, 한 이민자의 삶을 돌아보다 – ⑬ 그렇다면, 이곳은 도대체 어떤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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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내가 알고 있던 ‘학교’의 이미지가 완전히 깨지는 것을 느꼈다. 외딴 동네, 구석진 위치. 겉에서 보았을 때는 짐작하기 어려웠던 공간이 안으로 들어오자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조용히 일한다”는 말이 이렇게까지 철저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상상과 전혀 달랐던 내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넓고 정돈된 공용 공간이었다. 대기실은 예상보다 훨씬 컸고, 많은 사람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었다. 병원이나 공공기관에서 보던 공간보다도 오히려 더 단정해 보였다. 이곳이 단순히 아이들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는 사실은 곧바로 드러났다. 치과 진료실이 두 곳, 그리고 내과·소아과·침구 치료를 위한 진찰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모두 무료로 운영된다고 했다. 시설은 ‘최소한’이 아니라 ‘충분함’에 가까웠다. 학교이면서, 병원이었고, 삶의 공간이었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아이들이 공부하는 교실들이 이어졌다. 교실, 도서실, 소강당, 컴퓨터 교실, 그리고 봉제실까지. 공부만 시키는 곳이 아니라 아이들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삶의 기술을 가르치는 공간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남았다. 아이들이 만든 도자기, 손으로 뜬 작품들, 종이로 만든 묵주까지. 이 공간이 얼마나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 아이들과 함께 만들어졌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졌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내가 가장 놀랐던 것은 아주 사소해 보일 수 있는 부분이었다. 화장실이 유난히 깨끗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화장실을 너무 지저분하게 써서 청소가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공간을 어떻게 쓰는가’를 차분히, 반복해서 가르쳤다는 말이었다. 청소까지 직접 도맡아 하시는 수녀님들의 모습에서 이곳이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가 가장 분명하게 보였다. 그래서, 이곳은 어떤 곳이었을까 이곳은 단순한 학교도, 단순한 복지시설도 아니었다. 아프면 치료받고, 배우고, 기도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