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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한가운데서] 1970년대 중반, 우리 한인사회를 조명해 본다

  

 우리 브라질 한인들의 이민역사가 60년이 되었다 한다. 나도 브라질에 온지 햇수로는 48년이 되어가니 그 세월이 적은편은 아닌 것 같다.

 오늘 토요일(4일) 내원하신 환자분 중 같은 76년도에 오신 여성 한 분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당시 당시 이분께서(27살) 겪으신 어렵고 참담한 같은 일이.. 브라질 60년 이민역사에 한 부분을 차지했었다는 것을 알려 드리고자 한다.

보통 이민 역사의 대부분이 초기 이민 상황만을 조명하기에 브라질 한인 이민역사를 제대로 알려면 이런 흑역사의 시기도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해서다. 그러나 이런 나쁜일 가운데서도 훈훈한 이야기도 있기에 이 둘을 소개해 드리고자 한다.

브라질 이민 역사에서 70년대 중반은 브라질로 많은 이민자들이 왔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이 파라과이를 거쳐오는 경로로 당시는 이민자들이 이런 고통을 겪을 것이라는 것은 한 번도 예상치 못한 일로... 당시 많은 이들이 브라질에 도착하여 불안과 고통에 떨었습니다.

2가지 이야기를 따로 만들어 올려 드립니다.  

 [70년대]  나쁜 한인 이야기

https://koreabrazilnews.blogspot.com/2023/02/70.html

◈  [70년대]  좋은 한인 이야기

https://koreabrazilnews.blogspot.com/2023/02/70-76.html


 내가 늘 아쉬워 하는 것은 브라질 60년 이민역사 속에 우리 한인들이 살아온 내용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부모들이 이민 초기에 어떠한 모습으로 살았으며 또 어떤 생각으로 살아왔는지 알려줘야 한다. 그래서 이런 대화를 통해 부모와 자녀간의 이해와 유대관계를 더 깊게 만들어 가야 하는데 우리는 이민의 고달픔속에서 이런 맥을 끊고 살아온 것 같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또 후세들에게 선배 이민자로써의 좋고 나쁜점을 알려서 이들로 하여금 보다 더 바른길을 만들어 가게 하고 더 성공한 삶을 살아하게 하는 것도 우리의 몫 중 하나라 생각한다.

힘이 된다면 이러한 자료를 만들어 갔으면 하는 것도 나의 바람 중 하나다.


 



[70년대] 좋은 한인 이야기

  아래에 올리는 좋은 한인 이야기의 내막은 이렇습니다.

 10년 전 부터 브라질의 이민 경로에 대한 자료를 축적하던 중, 2015년 이선생님이라는 어르신과 대화를 하였는데 Ponta Porã에 사는 한국분이 이선생님이 브라질 국경을 넘을 때 돈 한 푼 안받고, 또 사례도 극구 거절하고 도와주셨다는 말을 듣게 되었고.. 이런 좋은분도 계셨다는 훈훈한 이야기를 당시 운영하던 [한브네트]에 올린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올린 후, 다음 날 이야기의 주인공되시는 분의 따님에게 연락을 받아 이분이 유정길님이셨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70년대]  좋은 한인 : 76년 이민 오신 유정길님(작고)


 Ponta Porã 사셨던 유정길님 이야기.. 

 1976년, 파라과이로 이민 가신 유선생님 가족은 다른 분들처럼 브라질로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유선생님의 부친이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알몸으로 쫒겼던 안좋은 기억이 있어 브라질에서 자녀들을 데리고 영주권이 없이 살아가는 것을 내켜하지 않아 그냥 파라과이에 정착하셨는데 파라과이의 Asuncion(아순시온)은 기온이 너무 더워 시원하고 살기 나은 곳 Pedro Juan Caballero라는 도시로 이주하였다 한다. 몇 년이 지나 브라질 사면령을 통하여 브라질 영주권도 취득하였지만 Ponta Porã에 계속 거주하셨다고 합니다.


           부모님과 함께 사진 찍은 Veronica 님 


  유선생님의 따님 Veronica님은 이렇게 회고하고 있습니다. 

저희 집은 한 3년동안 갑작스럽게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남을 도와주는 것을 좋아하시던 아버지는 사람들이 찾아오면 저의 방을 비우게 하고 그분들을 재우셨습니다. 

파라과이에서 브라질로 넘어가시는 분들을 주말까지 재우고 먹이신 후, 자가용에 낚시 도구들을 차 위에 올려놓린 후 사람들을 태워 연방경찰들의 눈을 피해 국경 넘는 것을 도우셨습니다. 

 한번은 국경을 넘으시던 분들 중, 다른 분들은 다 넘어가셨는데 한 남성 가족이 너무 떨고 긴장하여 국경을 넘지 못하고 다시 집으로 데려오셨는데, 되돌아오신 남성분은 자신이 목사라고 밝히며 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 "아저씨 용서하세요, 전 당신이 국경에 사는 브로커인줄 알았습니다. 아무 댓가도 없이 먹여주고 재워주길래.. 저 만큼 가다가 돈을 뺏고 보내려는가 의심하였습니다" 라고 하며 아버지의 두 손을 꼭 잡고 우시는 것을 봤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은 안정제를 드신 후 몇 일후 가족들을 데리고 다시 국경을 넘으셨고 잘 넘어가셨다고 합니다. 



  따님 Veronica님은 지겨울 정도로 새벽마다 찾아오는 분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소문듣고 찾아 왔다며.. 새벽부터 길가에서 한국분 집이냐고 소리지르며 부르던 분도 있어서 어린 Veronica님은 이웃 브라질 현지인들이 들을까봐 창피했었던 것을 기억한다고...

당시 이과수쪽은 검문이 심했고 또 강을 건너야 했지만, P .J. Caballero국경은 그냥 길 하나를 두고 두 나라 사람들이 한 동네처럼 살았던 곳이라 국경 넘기가 수월했다고 합니다. 다만 국경을 넘고 1시간 정도 가면 다른 도시가 나오고 또 검문이 있었는데 그 곳에 오래 살다보니 아버지가 주위 사람들과 안면도 많이 생기고 해서 도와주시기가 수월했던 것 같았다고..

아버지께서 당시 많이 힘드셨겠지만 저의 자녀들에게 좋은 기억을 남겨주셨다고 회상하였습니다.

이렇게 생전 알지도 못한 사람들을 도우시던 유선생님은 1990년 뇌출혈로 작고하셨습니다. 

(설명) 70년대와 80년 초, 사면령이 있기 전까지 브라질 이민은 이렇게 파라과이의 국경을 넘어 밀입국하는 분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들은 이민을 떠나오기 전 이런 고생이 있을 것이라고는 모른채..와서야 깨닫는 밀입국의 실정에 많이들 힘들어하셨습니다. 

 쫓기고 살며.. 잘못되면 잡혀서 추방되는 ㅠ_ㅜ 

당시의 사정을 잘 모르시는 분들은 밀입국을 도우는 것이 잘한일인가? 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당시의 상황을 아시는 분들은 한결같이 저와 같은 생각이실 것입니다. 

(고)유정길 선생님은 당시 브라질로 가는 한인들의 두렵고 힘든 국경 여정 길을 도우신.. 참 좋으신 분이셨습니다.


[70년대] 나쁜 한인 이야기

 💢 나쁜 한인 : 76년 이민 오신 김XX님의 이야기



  미스 Kim은 엄마와 오빠 식구들과 함께 파라과이를 거쳐 76년 브라질에 오셨다. 당시 미스 Kim은 27세의 아가씨였다.

[설명] 해외 이민이 유행하던 70년대 중반, 브라질 직접 이민이 중단된 상태라 브라질 이민을 가기 위해서는 파라과이로 이민 수속을 하였다. 먼저 파라과이로 간후 브라질로 입국하여야 했는데 이런 사실은 사람들이 브라질 이민을 수속하고 비자를 발급받은 후에야 알게된다. 

이민 수속 브로커들은 파라과이에 가서 브라질로 그냥 걸어들어가면 된다는 그런말을 하였는데 막상 도착해서는 그것이 밀입국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된다. 

한국에서 브라질로 이민을 떠나기 싫었던 미스 Kim은 오빠의 강압(?)에 어쩔수 없이 이민을 떠났고 도착한 후 밀입국으로 영주권 없이 살아야 하는 현실을 알고 오빠 식구는 브라질 오자마자 6개월 후 스페인으로 재 이주했는데, 미스 Kim은 엄마와 같이 열심히 일을 하고 빨리 돈을 모아 한국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으로 있었다 한다.

(설명-1) 당시 브라질에 갓 이민 오신 분들은 대부분 봉재업과 자수(수놓는일)일을 하였다. 

초기 이민자들이 농사일을 그만두고 도심지로 나와 의류업을 시작하였는데, 70년대 브라질로 밀입국한 한인들이 밖으로 외출하다가 경찰에 잡혀가는 일이 빈번하여 브라질 영주권이 없었던 한인들은 밖으로 잘 나가지 못하고 봉재업을 하였다.

봉재업을 하는 한인들은 일을 할 때 창문을 꼭 닫고 일을 해야 했다. 혹시라도 누가 보고 고발을 할까봐 두려워..  때론 경찰이 떴다는 소문이 나면 어김없이 문을 닫아걸었다.

 한인들의 실상을 아는 브라질 현지인들 중에서 한인들의 고통을 알고 도와주는 좋은 현지인도 많았다는 것을 후일 알게되었는데... 

이런 가운데 김WB 이라는 한인남성은 영주권이 없는 한인들을 고발하여 돈을 챙겼다 한다.

💢 미스 Kim의 말로는 김WB이라는 백수 한인남성이 감옥에 갖힌 한인들의 통역을 하다가 이들이 부탁하는 돈을 받고는 이를 통해 수입이 생긴다는 것을 알고 이런 일을 자행하였는데 그의 수중에는 영주권이 없는 사람들이 인적 기록이 있었다 한다. 

 

  하루는 이상한 남성이 집 앞을 두리번 거렸는데.... 미스 Kim은 그 날도 어느 날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일을 하고 점심을 먹었는데 한인 가정집을 돌아다니며 머리를 해 주시는 아주머니가 오셔서 점심을 차려드렸는데 얼마 안있어 경찰이 들이닥쳤다 한다.

경찰은 한인 여성 셋을 경찰차에 집어넣고서 무슨 큰 일이 생긴양 사이렌을 울리며 가는데 미스 Kim은 범죄자가 된 모양새로 잡혀가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고 너무 창피하게 느꼈다 한다.  

도착한 경찰서 안은 잡혀 온 한인들이 엄청 많았으며 남성도 열댓명 여성도 열댓명 정도 되었다 한다.

미용사 아주머니는 영주권이 있어서 풀려났고 미스 kim은 엄마와 함께 조사를 받았는데 통역을 해 주는 사람이 바로 밀고자인 김WB였다는 것을 알게되고, 이들 모녀자가 연고자도 없고 아는 사람들이 없다는 말에 조사에서 맨 뒷순위로 가게 된 것이라고 말하였다.

(설명) 보통 외국인의 밀입국은 연방경찰(당시는 외인경찰이라고 했다)의 소관이어서 경찰이 혹시라도 고발을 받을 경우 조사를 마치고 연방경찰서로 이송해야 하는데 이들 모녀는 뒷 순위로 밀려나면서 체포되어 수감되었던 사람들이 모두 다 나갈동안 이들은 영문도 모른채 수감된지 한 달이 훌쩍 넘어갔다 한다.

그러면서 감방에서는 더 이상 아무도 면회오는 사람도 없고 모녀 둘만 남게되어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브라질 죄수 한명이 손짓 발짓으로 엄마가 울고 있다고 알려줬다 한다.

브라질로 가기 싫다던 딸래미를 데리고 온 엄마는 27살 밖에 안된 딸의 참담한 상황에 너무 속상하여 울고 있었는데 이를 본 딸은 당시의 상황이 너무 기가차 감옥에서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며 난리를 치게 되었고... 이 상황에 감옥에서는 이들 모녀가 자살이라도 할까봐 놀라 끈이나 줄 같은 것은 다 치우기 까지 하였다 한다.

얼마 안 있어 당시 한인교회를 설립하신 김승만 목사님이 감옥에 오시고 이들은 본 후 이게 무슨일이냐고 하시며 미스 Kim이 오래전에 파라과이로 간 줄 았었다고 하며 깜짝 놀라셨다 한다.

[사실 확인함] 오늘 일요일(2023년 2월 5일, 아침) 이런 사실 확인을 위해 김목사님의 따님되시는 도나 Sara를 만났는데, 당시 아버지께서는 감옥을 많이 왔다 갔다 하셨는데 당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체포되어 수감되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따님인 도나 Sara는 미스 Kim 언니를 잘 알고 계셨으며 아버지가 미스 Kim 언니 모녀를 많이 걱정하여 면회를 자주 갔었다고 하였다.

몇 일 후 이들은 연방경찰서로 이송되고 또 다시 조사를 마친 모녀는 봉헤찌로에 있는 어떤 감옥에 수감되었는데.. 미스 Kim은 진짜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지하 감옥에 수감되면서 너무 두렵고 무서웠다고 한다.

다행히 한인남성 한 사람이 와서 파라과이가는 여비가 없기때문에 감옥에 조금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며 조만간 추방이 될 것이라 알려주고.. 성경책과 음식을 갖다 주었다 한다. 이 한인남성은 가라오케에서 싸움에 휘말려 수감된 사람이라 함.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니 15살 정도 된 나도 어렴풋이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는 것이 생각난다. 당시는 너무나 많은 이들이 하루건너 경찰에 잡혀갔었다. 경찰들은 한인들을 잡아가면서 불의의 소득을 챙기기도 하였다.


💢 이렇게 당시는 나쁜 한인들이 있었고 이런 저런 일들이 많았다.

- 바느질 일을 시키고 삮을 주지 않은 악덕업자들도 더러 있었고

- 이렇게 남을 고발하여 돈을 버는 이들도 있었으며

- 파라과이에서 브라질로 데려다주는 브로커 중에는 사람들을 등쳐먹는 이들도 너무 많았고

- 영주권이 없다는 이유로 쌍빠울로 대학시험에 붙었지만 입학을 못하는 사람도 있었고

- 하루 건너 누가 잡혀갔네, 강도에 당했네, 누가 죽었네, 이런 흉흉한 소문들이 무성했다.

- 돈벌이를 위해 영주권을 만들어 준다고 하고 가짜 영주권을 만들어 주는 이들도 있었다.

- 어떤 이는 남의 운전면허증을 가지고 운전하였는데 상대방이 잘못했는데도 도망가야했다.  혹시라고 경찰이 와서 잡아갈까봐...

- 일주일 내내 집안에서 일만 하다가 일요일이 되어 교회를 갔다. 교회를 가는 이유가 사람들이 그리워서 이기도 했지만 교회에 가야 이런 저런 정보를 알고 몸을 사릴수 있었기에...


  70년대 중반에는 영주권 없는 한인들이 경찰을 엄청 무서워했다. 

▷ 경찰을 보면 얼굴도 마주치지 않고, 보면 도망갔는데 어떤 한인은 경찰을 보고 괜히 뛰다가 잡혀간 사람도 있었다.

▷ 내 친구 어머니(박권사님)는 두번이나 경찰에 잡혀가 파라과이에 추방된 분도 있으셨는데 그 후에는 다섯 걸음을 채 못가 고개를 휙 뒤로 돌리는 버릇이 생긴 분도 있었다. 

▷ 추방된 분이 브라질로 다시 오기위해 밀입국을 또 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3번이나 잡히신 분도 계셨다. 

▷ 한 여학생은(당시 13살?) 학교를 다녀오다가 자동차에 치었는데 경찰이 두려워 매일 조심해서 다니라고 한 부모님에게 혼날까봐 뛰어 집으로 도망왔다. 차 주인이 놀라 집까지 따라왔지만 별일없으니 가라고 문도 열어주지 않았다. 같이 살았기에 너무나 잘 안다.

 1~2년 동안 같이 살았던 딸 3명은 둔 엄마도 가족이 경찰에 잡혀 파라과이로 추방되었다가 우리 집으로 이사와서 같이 사셨었다. 

그냥 멋모르고 이민 온 브라질에서 어떤 하루가 때론 우리 한인들에게 지옥같은 날이 되기도 하였다.


    "브라질 한인사회가 의류업종으로 크게 발전할 수 밖에 없었던 큰 이유?"

  우리 한인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모아가며 내린 결론이다. 왜 우리 브라질 한인사회가 의류업으로 번창하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해 본 것인데...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까지 영주권이 없어 다른 일을 하지 못하고 외출을 못하고 집에서 할 수 있는 제일 나은 돈벌이가 봉재업과 자수일 같은 가내공업이었는데... 

먼저 오신분들의 의류업을 계속 지탱할 수 있게 어마 어마한 양의 의류 수공업을 영주권 없는 사람들이 도맡았기 때문이다.

# 예를 들어 당시 15살~16살이었던 나도 학교 수업을 마친 후 집에서 4시간의 핸들수(자수의 일종)를 하여 미화 100불을 벌 수 있을 정도였다. 하루 벌면 1년치 쌀과 가스비용을 충당할 수 있었다. 봉재업은 자수에 비해 단가가 낮아 하루종일 일해야 100불 정도 벌었을 것으로...

▷ 영주권이 없던 사람들이 이런 이유로 초기 봉제업을 시작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고..

▷ 봉제업으로 빨리 돈을 모아 의류제품을 시작하는데, 계속해서 이어지는 브라질 이민으로 브라질의 의류업은 10~20년 사이 우리 한인들이 장악하게 되는 상황으로 변모한 것이다.

▷ Cambuci 와 Aclimacao에 한인들이 많이 살게된 것도 한인들이 좀 더 조용하고 안전한 동네를 선호하면서, 위험했던 옛 한인촌 Conde de Sarzedas를 떠나게 되었다.


👉 옛날 한인촌으로 불리운 Rua Conde de Sarzedas 거리

https://koreabrazilnews.blogspot.com/2022/07/rua-conde-de-sarzedas.html   

 


👪 브라질의 한인들 : [70년 대] 72년도에 오신 박선생님 일가족


▷ 이민 오신 해 : 1972년

▷ 도착 경로 : 캐나다 비행기를 타고 아르헨티나 등 여러나라를 거쳐 Congonhas 공항입국

▷ 이민 : 가족 이민-브라질로 직접 오셔서 영주권 받으심


오늘 81세의 여성 어르신이 내원하셨다.

질문 : 이민 오신지 얼마나 되셨어요?

답변 : 51년 되었고 5식구가 직접 브라질로 오셨다고 함(부부와 자녀 셋)


질문 : 어떻게 이민을 생각하셨나요?

답변 : 당시 아빠가 브라질로 이민을 갈까 했는데 이민이 막혀있어서 아르헨티나로 먼저 갈까 생각하던 중... 우연히 일하는 곳에 외국인 한 명이 찾아왔다고 한다.

건축자재업에 일하시던 박선생님(남편분)은 급하게 여러가지를 만들어 달라는 이 외국 남성의 부탁에 빨리 작업을 해 드렸고 이 남성은 빠르고 만족스러운 작업에 고마움을 느꼈는데...

이 외국 남성이 브라질의 Paulo라는 영사였다고 한다. 이 영사는 고마움에 당신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싶다고 하였고, 박선생님께서는 브라질로 이민을 가고 싶다고 하는 박선생님의 소원을 들어주면서 이민 비자를 선물하였다 한다.

이런 계기로 Paulo라는 영사와 가까와지게 되었고 브라질에 온 후에도 자주 만나 일본촌으로 놀러가는 등 좋은 관계를 맺었다고 하신다.

1970년대는 브라질 이민이 차단되어 당시는 많은 분들이 이웃나라인 파라과이나 아르헨티나 칠레 등을 거쳐 브라질로 입국하면서 많은 고생을 하던 시기였는데 이렇게 훈훈한 정을 쌓아 브라질로 직접 이민 온 케이스도 있어 이를 소개해 드린다.


💦 우리 브라질 이민 60년 역사 속에 60년대, 70년대, 80년대 이민 오신 가정의 이민 계기와 당시 있었던 애로와 에피소드 자료를 조금씩 모아놓고 있습니다. 이런 각 가정의 이민 자료가 브라질 이민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까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