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쁜 한인 : 76년 이민 오신 김XX님의 이야기
미스 Kim은 엄마와 오빠 식구들과 함께 파라과이를 거쳐 76년 브라질에 오셨다. 당시 미스 Kim은 27세의 아가씨였다.
[설명] 해외 이민이 유행하던 70년대 중반, 브라질 직접 이민이 중단된 상태라 브라질 이민을 가기 위해서는 파라과이로 이민 수속을 하였다. 먼저 파라과이로 간후 브라질로 입국하여야 했는데 이런 사실은 사람들이 브라질 이민을 수속하고 비자를 발급받은 후에야 알게된다.
이민 수속 브로커들은 파라과이에 가서 브라질로 그냥 걸어들어가면 된다는 그런말을 하였는데 막상 도착해서는 그것이 밀입국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된다.
한국에서 브라질로 이민을 떠나기 싫었던 미스 Kim은 오빠의 강압(?)에 어쩔수 없이 이민을 떠났고 도착한 후 밀입국으로 영주권 없이 살아야 하는 현실을 알고 오빠 식구는 브라질 오자마자 6개월 후 스페인으로 재 이주했는데, 미스 Kim은 엄마와 같이 열심히 일을 하고 빨리 돈을 모아 한국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으로 있었다 한다.
(설명-1) 당시 브라질에 갓 이민 오신 분들은 대부분 봉재업과 자수(수놓는일)일을 하였다.
초기 이민자들이 농사일을 그만두고 도심지로 나와 의류업을 시작하였는데, 70년대 브라질로 밀입국한 한인들이 밖으로 외출하다가 경찰에 잡혀가는 일이 빈번하여 브라질 영주권이 없었던 한인들은 밖으로 잘 나가지 못하고 봉재업을 하였다.
봉재업을 하는 한인들은 일을 할 때 창문을 꼭 닫고 일을 해야 했다. 혹시라도 누가 보고 고발을 할까봐 두려워.. 때론 경찰이 떴다는 소문이 나면 어김없이 문을 닫아걸었다.
한인들의 실상을 아는 브라질 현지인들 중에서 한인들의 고통을 알고 도와주는 좋은 현지인도 많았다는 것을 후일 알게되었는데...
이런 가운데 김WB 이라는 한인남성은 영주권이 없는 한인들을 고발하여 돈을 챙겼다 한다.
💢 미스 Kim의 말로는 김WB이라는 백수 한인남성이 감옥에 갖힌 한인들의 통역을 하다가 이들이 부탁하는 돈을 받고는 이를 통해 수입이 생긴다는 것을 알고 이런 일을 자행하였는데 그의 수중에는 영주권이 없는 사람들이 인적 기록이 있었다 한다.
하루는 이상한 남성이 집 앞을 두리번 거렸는데.... 미스 Kim은 그 날도 어느 날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일을 하고 점심을 먹었는데 한인 가정집을 돌아다니며 머리를 해 주시는 아주머니가 오셔서 점심을 차려드렸는데 얼마 안있어 경찰이 들이닥쳤다 한다.
경찰은 한인 여성 셋을 경찰차에 집어넣고서 무슨 큰 일이 생긴양 사이렌을 울리며 가는데 미스 Kim은 범죄자가 된 모양새로 잡혀가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고 너무 창피하게 느꼈다 한다.
도착한 경찰서 안은 잡혀 온 한인들이 엄청 많았으며 남성도 열댓명 여성도 열댓명 정도 되었다 한다.
미용사 아주머니는 영주권이 있어서 풀려났고 미스 kim은 엄마와 함께 조사를 받았는데 통역을 해 주는 사람이 바로 밀고자인 김WB였다는 것을 알게되고, 이들 모녀자가 연고자도 없고 아는 사람들이 없다는 말에 조사에서 맨 뒷순위로 가게 된 것이라고 말하였다.
(설명) 보통 외국인의 밀입국은 연방경찰(당시는 외인경찰이라고 했다)의 소관이어서 경찰이 혹시라도 고발을 받을 경우 조사를 마치고 연방경찰서로 이송해야 하는데 이들 모녀는 뒷 순위로 밀려나면서 체포되어 수감되었던 사람들이 모두 다 나갈동안 이들은 영문도 모른채 수감된지 한 달이 훌쩍 넘어갔다 한다.
그러면서 감방에서는 더 이상 아무도 면회오는 사람도 없고 모녀 둘만 남게되어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브라질 죄수 한명이 손짓 발짓으로 엄마가 울고 있다고 알려줬다 한다.
브라질로 가기 싫다던 딸래미를 데리고 온 엄마는 27살 밖에 안된 딸의 참담한 상황에 너무 속상하여 울고 있었는데 이를 본 딸은 당시의 상황이 너무 기가차 감옥에서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며 난리를 치게 되었고... 이 상황에 감옥에서는 이들 모녀가 자살이라도 할까봐 놀라 끈이나 줄 같은 것은 다 치우기 까지 하였다 한다.
얼마 안 있어 당시 한인교회를 설립하신 김승만 목사님이 감옥에 오시고 이들은 본 후 이게 무슨일이냐고 하시며 미스 Kim이 오래전에 파라과이로 간 줄 았었다고 하며 깜짝 놀라셨다 한다.
[사실 확인함] 오늘 일요일(2023년 2월 5일, 아침) 이런 사실 확인을 위해 김목사님의 따님되시는 도나 Sara를 만났는데, 당시 아버지께서는 감옥을 많이 왔다 갔다 하셨는데 당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체포되어 수감되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따님인 도나 Sara는 미스 Kim 언니를 잘 알고 계셨으며 아버지가 미스 Kim 언니 모녀를 많이 걱정하여 면회를 자주 갔었다고 하였다.
몇 일 후 이들은 연방경찰서로 이송되고 또 다시 조사를 마친 모녀는 봉헤찌로에 있는 어떤 감옥에 수감되었는데.. 미스 Kim은 진짜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지하 감옥에 수감되면서 너무 두렵고 무서웠다고 한다.
다행히 한인남성 한 사람이 와서 파라과이가는 여비가 없기때문에 감옥에 조금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며 조만간 추방이 될 것이라 알려주고.. 성경책과 음식을 갖다 주었다 한다. 이 한인남성은 가라오케에서 싸움에 휘말려 수감된 사람이라 함.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니 15살 정도 된 나도 어렴풋이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는 것이 생각난다. 당시는 너무나 많은 이들이 하루건너 경찰에 잡혀갔었다. 경찰들은 한인들을 잡아가면서 불의의 소득을 챙기기도 하였다.
💢 이렇게 당시는 나쁜 한인들이 있었고 이런 저런 일들이 많았다.
- 바느질 일을 시키고 삮을 주지 않은 악덕업자들도 더러 있었고
- 이렇게 남을 고발하여 돈을 버는 이들도 있었으며
- 파라과이에서 브라질로 데려다주는 브로커 중에는 사람들을 등쳐먹는 이들도 너무 많았고
- 영주권이 없다는 이유로 쌍빠울로 대학시험에 붙었지만 입학을 못하는 사람도 있었고
- 하루 건너 누가 잡혀갔네, 강도에 당했네, 누가 죽었네, 이런 흉흉한 소문들이 무성했다.
- 돈벌이를 위해 영주권을 만들어 준다고 하고 가짜 영주권을 만들어 주는 이들도 있었다.
- 어떤 이는 남의 운전면허증을 가지고 운전하였는데 상대방이 잘못했는데도 도망가야했다. 혹시라고 경찰이 와서 잡아갈까봐...
- 일주일 내내 집안에서 일만 하다가 일요일이 되어 교회를 갔다. 교회를 가는 이유가 사람들이 그리워서 이기도 했지만 교회에 가야 이런 저런 정보를 알고 몸을 사릴수 있었기에...
70년대 중반에는 영주권 없는 한인들이 경찰을 엄청 무서워했다.
▷ 경찰을 보면 얼굴도 마주치지 않고, 보면 도망갔는데 어떤 한인은 경찰을 보고 괜히 뛰다가 잡혀간 사람도 있었다.
▷ 내 친구 어머니(박권사님)는 두번이나 경찰에 잡혀가 파라과이에 추방된 분도 있으셨는데 그 후에는 다섯 걸음을 채 못가 고개를 휙 뒤로 돌리는 버릇이 생긴 분도 있었다.
▷ 추방된 분이 브라질로 다시 오기위해 밀입국을 또 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3번이나 잡히신 분도 계셨다.
▷ 한 여학생은(당시 13살?) 학교를 다녀오다가 자동차에 치었는데 경찰이 두려워 매일 조심해서 다니라고 한 부모님에게 혼날까봐 뛰어 집으로 도망왔다. 차 주인이 놀라 집까지 따라왔지만 별일없으니 가라고 문도 열어주지 않았다. 같이 살았기에 너무나 잘 안다.
▷ 1~2년 동안 같이 살았던 딸 3명은 둔 엄마도 가족이 경찰에 잡혀 파라과이로 추방되었다가 우리 집으로 이사와서 같이 사셨었다.
그냥 멋모르고 이민 온 브라질에서 어떤 하루가 때론 우리 한인들에게 지옥같은 날이 되기도 하였다.
"브라질 한인사회가 의류업종으로 크게 발전할 수 밖에 없었던 큰 이유?"
우리 한인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모아가며 내린 결론이다. 왜 우리 브라질 한인사회가 의류업으로 번창하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해 본 것인데...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까지 영주권이 없어 다른 일을 하지 못하고 외출을 못하고 집에서 할 수 있는 제일 나은 돈벌이가 봉재업과 자수일 같은 가내공업이었는데...
먼저 오신분들의 의류업을 계속 지탱할 수 있게 어마 어마한 양의 의류 수공업을 영주권 없는 사람들이 도맡았기 때문이다.
# 예를 들어 당시 15살~16살이었던 나도 학교 수업을 마친 후 집에서 4시간의 핸들수(자수의 일종)를 하여 미화 100불을 벌 수 있을 정도였다. 하루 벌면 1년치 쌀과 가스비용을 충당할 수 있었다. 봉재업은 자수에 비해 단가가 낮아 하루종일 일해야 100불 정도 벌었을 것으로...
▷ 영주권이 없던 사람들이 이런 이유로 초기 봉제업을 시작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고..
▷ 봉제업으로 빨리 돈을 모아 의류제품을 시작하는데, 계속해서 이어지는 브라질 이민으로 브라질의 의류업은 10~20년 사이 우리 한인들이 장악하게 되는 상황으로 변모한 것이다.
▷ Cambuci 와 Aclimacao에 한인들이 많이 살게된 것도 한인들이 좀 더 조용하고 안전한 동네를 선호하면서, 위험했던 옛 한인촌 Conde de Sarzedas를 떠나게 되었다.
👉 옛날 한인촌으로 불리운 Rua Conde de Sarzedas 거리
https://koreabrazilnews.blogspot.com/2022/07/rua-conde-de-sarzeda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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