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이민 50년, 한 이민자의 삶을 돌아보다 – ⑮ 온라인에서 만난 인연들, 그리고 도움의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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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로운 문명 속에서 만난 첫 친구 모뎀 소리로 세상과 연결되던 시절, 인연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AI가 만든 이미지) 사람은 태어나 서로 만나게 되며 사귀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새로운 문명의 변화로 인해 또 다른 친구들을 사귈 수 있게 된다. 나 역시 그랬다. 브라질에서 인터넷이 시작되며 모뎀으로 접속하던 때, 여러 친구들 중 좋은 친구를 하나 만나게 되었다. 컴퓨터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할 때… 아마 1998년 정도 되지 않나 싶다. 좋은 글, 감동 글을 찾아다니다가  Daum 에서 만난 운영자분. 얼굴도 모르지만 글을 너무 잘 쓰고 말도 조리 있게 하셔서 호감이 가 꼬셨다 ㅎㅎ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넷 상에서도 유명한 여성 시인이었다. 송XX, 시인이자 화가였던 이 분은 항상 내가 필요할 때 필요한 동영상이나 그림을 만들어 주셨다. 나에게는 지금의 AI(인공지능) 같은 분이셨다. 자그만치 20년 넘게 우리는 가까운 친구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실크로드라는 희귀불치병으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때도 있는 이 분은 브라질 한인사회를 20년 이상 지켜보았고, 또 브라질 한인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나를 도와 한인사회에 도움을 주신 분이시기도 하다. 필요할 때만 내가 찾았는데… 지금은 건강히 잘 계시는지, 좀 전 안부 메일을 보냈는데 한메일이 더 이상 되질 않는다. ㅠㅠ 2. 포어 강의가 시작되다 – 남미로닷컴 이후 온라인 상에서 또 다른 친구 하나가 생겼다. 한인닷컴이  남미로닷컴 으로 넘어간 후, 그곳에서 만난 친구다. 한인닷컴부터 남미로닷컴까지, 한인들의 가장 큰 이슈는 늘 영주권 문제였다. (그 다음에 하나로가 있었는데, 그곳에서도 가장 중요한 주제는 역시 영주권이었다) 나는 늘 익명으로 글을 썼는데, 어느 날 한 사람이 포어를 가르쳐 달라고 하더니 여러 명이 동시에 포어를 가르쳐 달라고 말한다. 엥, 포어?? 포어는 나와는 거리가 멀고 자신도 없는데? 나도 하기 힘든 포어를 누굴 가르치나 싶어 거절했지만, 기...

브라질 이민 50년, 한 이민자의 삶을 돌아보다 ― ㉓ 결단을 미룬 공동체 (글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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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제13회 한국문화의 날. 한인복지회를 포함해 한인사회는 이미 현장에서 함께 움직여 왔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이 힘을 지속시키는 구조다. 쓰이지 않는 한인회 건물, 감당 못 하는 복지회 건물 한인회에는 ‘한인회관’이라는 건물이 있다. 그러나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 아끌리마썽에 세워진 이 건물은 수십 년 동안 사실상 비어 있었고, 지금의 한인 생활권과도 완전히 멀어진 공간이 되었다. 한인회 이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브라질 한인은 없다. 그럼에도 왜 아무 변화가 없었는가. 과거의 공로와 정서가 판단을 막았고, 그 사이 한인회는 탄탄한 중심 기능을 갖지 못했다. 지금도 한인회 회의는 회관이 아닌 식당이나 임시 공간에서 열린다. 한인회 건물은 있지만, 한인회는 그 안에 없다. 상징을 남기는 것이 중요한가, 아니면 새로운 한인들과 젊은 세대의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중요한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오랫동안 결단을 미뤄 왔다. 한인복지회도 다르지 않다. 국수공장이던 대형 건물을 9년간 고쳐 사용해 왔지만, 노후한 구조는 끊임없는 보수비를 요구한다. 봉사 첫날 눈에 띄게 지저분했던 환경, 개인 비용으로 페인트와 커튼을 교체해야 했던 현실은 이 공간이  시스템이 아닌 개인의 헌신으로 유지되어 왔음 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제는 분명히 한계를 넘었다. 자원은 있다, 그러나 묶이지 않았다 한인회에는 건물이 있고, 한인복지회에는 건물과 함께 OSCIP라는 강력한 제도가 있으며, 노인회에는 건립을 위해 비축된 자금이 있다. 우리는 없어서 못 하는 것이 아니다. 각자 따로 움직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특히 한인복지회는 기업 후원을 세금 공제로 연결할 수 있는 제도를 가지고 있음에도, 공간과 구조가 분산되어 실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의 구조에서는 아무리 좋은 자원도 흩어질 수밖에 없다. 의료봉사는 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를 움직이지 못한다 의료봉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

브라질 이민 50년, 한 이민자의 삶을 돌아보다 ― ㉒ 잊고 있던 이야기들, 재정과 봉사의 갈림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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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두 노인회의 이야기를 올리고, 마지막으로 결론의 글과 해결방안의 글 두 편을 올리며 끝을 맺으려 했었다. 그런데 문득, 잊고 지나간 이야기 몇 가지가 있어 이렇게 정리해 올려본다. 15년 전에는 일을 하면서 무엇이 시작이었고, 무엇이 중간이며, 무엇이 마지막이었는지 기억이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글을 쓰기 위해 예전 자료들을 다시 살펴보며 그 흐름을 비교적 정확히 알게 되었다. 1. 한인회에 들어가게 된 이유 – 재정 확보 서주일 회장이 나를 한인회로 불러들인 가장 큰 목적은 재정 확보와 관련된 일이었다. 당시 나에게는 브라질에 사는 한인 청소년들이 어떻게 하면 긍지를 가질 수 있을지, 또 어떤 방식으로 노인분들을 위한 봉사를 자발적으로 이어갈 수 있을지에 대한 두 가지 고민이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재정 확보를 위한 한 가지 방법을 제안했고, 그 방법은 “다른 사람은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결국 나를 한인회에 앉히는 계기가 되었다. 그 아이디어는 바로 효과를 보았고, 많은 한인들이 자발적으로 1년 치 한인회비를 납부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2년간 약 500명 × 350헤알 × 2 = 약 350,000헤알) 이때 처음으로, ‘의지만 있으면 한인사회도 충분히 움직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2. 한인회보와 사이트들, 그리고 감당하기 어려운 확장 이후 한인회보를 만드는 과정에서 유대인 봉사단체 Unibes를 취재하게 되었고, 그들의 활동이 인상 깊다는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한 사람이 “사이트를 만들어 주겠다”고 나섰다. 며칠 뒤, 실제로 사이트 하나가 만들어졌고 그 일을 계기로 상황은 급격히 달라졌다. 한인회 재정을 위한 ‘한인지정업소’ 프로그램, 매달 발간해야 했던 한인회보, 한인회 홈페이지, 꼬레아닷컴, 양지노인회 블로그와 어머니 합창단 블로그까지. 일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이미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한인업소록 제작 요청이 이어졌고, 브라질 한인 인구조사, 이른바 ‘한인 센서’ 제...

브라질 이민 50년, 한 이민자의 삶을 돌아보다 ― ㉑ 조심스럽게 남기는 기록, 봉헤찌로의 두 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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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I 생성 이미지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남겨야 할 이야기 사실 노인회에 대해서 글을 쓰는 것은 늘 조심스럽습니다. 어르신들이 다 보통 분들이 아니시기에… 겪어본 사람만이 압니다. (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용을 쓰고 나면 그다음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기에 오늘은 이 글을 올려봅니다. 서주일 한인회장이 한인회에 있을 당시, 봉헤찌로에는  양지노인회 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한인회보 안에 넣을 기사와 함께 한인 단체에 대한 동정을 알기 위해 Rua Correia de Melo 77번지 아파트 11호를 방문했습니다. “조그만 살라 하나에…” 양지노인회와 기록의 시간 방문한 양지노인회는 계단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어르신들이 오르내리기에는 조금 많아 보이는 계단을 올라가니, 조그만 살라 하나, 조그만 방 두 개, 조그만 부엌이 나옵니다. 그 안에 15명~20명 가량의 어르신들이 계셨고, 모두 식사 중이셨습니다. 양지노인회를 맡고 계신 유경렬 어르신은 등록된 분들이 43명이고, 매일 20명 정도의 어르신들이 점심과 간식을 드시며 여가를 보내신다고 하셨습니다. 당시 정목사님의 부인이신 이상례 사모님께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식사를 챙기시고, 간호사이셔서 아프신 곳도 봐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토요일에는 홍선영이라는 분이 하루를 도우신다고도 하셨고요. 한인회가 회보를 만든다는 소식이 양지노인회 유회장님 귀에 들어갔나 봅니다. “우리도 회보를 만들겠다”며 비용을 알아봐 달라고 하셨고, 비용을 알려드리자 이번에는 회보를 만들겠다고 하시며 그 안에 좋은 내용의 글과 함께 저에게 한방 칼럼도 써 달라고 하십니다. 아… 이 무슨 날벼락같은 일이 ㅜ-ㅠ 유회장님 성격을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ㅎㅎ 이분이 마음먹으면 일이 커지는 스타일이라 솔직히 거절이라는 선택지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유회장님은 제가 존경하는 김학종 목사님의 오랜 친구분이셨고, 개인적으로도 오래 알고 지내온 분이셨습니다. 다행히 저와는 사돈 관계이기도 해서 다른 분들께 하시던 것보다는 저...

브라질 이민 50년, 한 이민자의 삶을 돌아보다 ― ⑳ 한인복지회에서 본 봉사와 구조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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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을 시작하며 이 글은 한인복지회를 평가하거나 비판하기 위한 글이 아니다. 15년 이상 직접 관여하며 보고 겪은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개인적 증언이며, 해법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이어가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판단이나 결론보다, 사실과 체감한 현실만을 담고자 한다. 2010년 촬영한 한인복지회 건물 외관 – Rua Hipódromo, Brás 우연처럼 시작된 한인복지회와의 인연 한인복지회를 알게 된 것은 서주일 회장이 막무가내로 나를 임원으로 만들면서부터였다. 한인회보를 만들고 싶지만 제작 비용 문제로 주춤하던 시점에 “ 그냥 우리가 만들면 되죠 ”라고 했던 나의 말 한마디가 결국 일을 떠맡게 된 시작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것은 내 인생의 큰 실수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그때는 미처 몰랐다. 생각과 말은 반드시 시간을 두고 해야 한다는 것을 , 그 후에야 깨달았다고 해야 할까. 한의원을 운영하며 매달 한인회보를 제작하는 일은 신체적 피로보다 정신적 피로가 수십 배 더 컸다. 임원 중 절반은 이메일조차 제대로 사용하지 못해 각종 자료를 직접 종이로 받아 정리해야 했고,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마 지금도 서주일 박사는 그 시기 내 상황이 어땠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모두가 정신없이 바빴으니까. 밥을 사도 수십 번은 사야 할 상황이었지만 아직까지 한 번도 안 산 걸 보면, 역시 몰랐던 게다. (웃음) 한인복지회의 모습과 시간이 남긴 현실 한인회보를 채우기 위해 방문한 곳 중 하나가 한인복지회였다. 2010년 9월 25일, 어린이날 행사가 함께 열리던 날이었고 생각보다 훨씬 큰 규모의 건물이 인상적이었다. 당시 기록을 정리해 보면, 한인복지회는 Rua Hipodromo, 125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김정한 씨가 국수공장 매입 후, 전면 500㎡(10m × 50m) 규모의 건물을 기증했고 주성건 씨가 9년에 걸친 개조를 통해 총 건축면적 1,406.77㎡의 건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한인복지...

브라질 이민 50년, 한 이민자의 삶을 돌아보다 – ⑲ 총영사관, 한 사람의 선택이 남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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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질 이민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 총영사관 브라질 이민사를 이야기할 때 총영사관은 빠질 수 없는 존재다. 한·브라질 외교관계 수립 이후 거의 60년 가까이 총영사관은 늘 그 자리에 있었고, 이민자들의 삶과 함께 기쁨과 불편함을 동시에 안겨 준 공간이기도 했다. 이민 초기의 기억, 그리고 변화 이민 초기, 총영사관에 대한 기억은 솔직히 좋지 않았다. 한두 차례 방문했던 당시의 기억 속 총영사관은 ‘불친절’이라는 말이 먼저 떠오를 만큼 부담스러운 곳이었다. 영사관에 다녀오면 기분이 상했다는 교민들의 이야기도 흔했다. 지금 돌아보면 영사들이라기보다는 현지에서 근무하던 직원들의 응대 문제였고, 이는 결국 조직 차원의 교육과 시스템 부족에서 비롯된 일이었을 것이다. 약 30년 전부터 총영사관의 분위기는 점차 달라지기 시작했다. 교민들을 대하는 태도도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고, 전반적인 서비스 역시 나아졌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러한 변화는 부임하는 총영사에 따라 여전히 차이가 있었다는 점도 사실이다. 같은 한민족, 다른 거리감 2000년 이후 삼성, LG 등 한국 기업 주재원 가족들을 치료하며 의외의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교포들을 조심하라”는 지침을 받고 왔다는 것이다. 브라질 교포들은 대체로 정이 많고 친절한 편인데, 서로를 경계하며 거리를 두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이민자, 공관원, 주재원 모두 같은 한민족으로 해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지만, 서로 다른 시선으로 살아가는 현실이 아쉽게 느껴졌다. 총영사관의 역할과 현실 상파울루 파울리스타에 위치한 주브라질 한국 총영사관이 입주한 건물. 총영사관의 공식 임무는 대한민국 국민 보호, 영사 서비스 제공, 기업 진출 지원과 문화 홍보, 한인사회 지원이다. 그러나 실제로 브라질에서는 오랫동안 한인 동포 지원이 크게 체감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 이유를 들어보면, 초기 한인사회가 스스로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었고 그 관행이 굳어졌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따른다.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더 실감난...

브라질 이민 50년, 한 이민자의 삶을 돌아보다 – ⑱ 교회는 있었지만, 본은 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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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질 이민 사회와 한인 교회에 대한 기록 우리나라 대한민국 사람들이 해외로 나가면, 다른 민족과는 달리 비교적 빠른 성장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브라질 역시 예외는 아니었고, 한인들의 발전은 유독 두드러진 편이었다. 이태리인과 유대인, 아랍인이 주름잡던 브라질의 의류 상권에서 한인들은 빠른 속도로 정착하고 성장해 나갔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현지 종업원들과의 갈등도 적지 않게 발생했다. 그 중심에는 한인 특유의 급한 성격과 언어의 장벽이 있었다. 이러한 ‘급함’은 전쟁 이후의 압축 성장에서 비롯된 것인지, 수천 년 외세 침략 속에서 늘 깨어 있어야 했던 역사적 경험 때문인지, 아니면 타고난 기질의 문제인지 쉽게 단정할 수는 없다. 이는 개인적으로 한국인의 성향을 돌아보며 던져본 질문일 뿐이다. 다만 이러한 성향과 언어 장벽으로 인한 소통의 단절은 브라질 현지인들에게 “한인들은 돈 벌어서 떠날 사람들”이라는 인식을 남겼다. 실제로 많은 한인들이 수십 년의 삶 속에 미국으로 떠나거나 한국으로 역이민을 선택했다. 그 이유는 영주권 문제와 치안이 컸지만, 현지인들이 그런 사정을 알 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인들은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왔고 그 중심에는 늘 한인 교회가 있었다. 이민 초기 목회자들은 우리가 이 땅에 발을 디딘 이유가 우리만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살아갈 이 땅의 아픈 이웃을 외면하지 않기 위함이라는 신념 아래 교회를 세웠다. 내가 있던 교회는 상파울루에 있던 유명한 감옥소 Carandiru의 수감자들을 돌보는 사역도 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특정 교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많은 한인 교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이웃을 돕던 당시의 모습이기도 했다. 연합교회와 한인교회는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우범지역을 떠나지 않으며 주변 현지인들을 돌보는 역할을 감당해 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과연 그 선택이 옳았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답하기 어렵다. 실제로 지난 수십 년간 많은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