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asil, 50 anos de imigração – ⑪ Pessoas que viveram sorrindo, pessoas que partiram sorrin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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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avô do arroz que eu conheci, o Avô Mida Na comunidade coreana, ele era chamado de Avô Mida , ou simplesmente de Avô do Arroz . Eu imigrei para o Brasil em 1976 e, de vez em quando, o encontrava em mercados ou na igreja. Era um homem de poucas palavras. Além de um simples “olá”, quase não falava nada. Na minha memória, o Avô Mida era alguém que sempre cumprimentava primeiro e respondia tudo com um sorriso. Ainda me lembro das pessoas dizendo em voz baixa: “É ele… o Avô Mida”. No final dos anos 1970, quando havia muitos cultos de avivamento nas igrejas coreanas do Brasil, o Avô Mida estava sempre presente. Dizia-se que ele sentia muita saudade dos coreanos e que ia a qualquer lugar onde houvesse coreanos reunidos. Também ouvi histórias de que ele havia dado garantia para muitos compatriotas e acabou perdendo quase todos os seus bens. Soube depois que até mesmo um antigo parque da comunidade coreana foi criado graças à sua doação. As boas ações do Avô Mida sempre ...

브라질 이민 50년, 한 이민자의 삶을 돌아보다 ⑪ 웃으며 살다, 웃으며 떠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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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아는 쌀 할아버지, 미다할아버지 한인분들은 그분을 미다할아버지 , 혹은 쌀 할아버지 라고 불렀습니다. 저는 1976년에 이민을 왔는데, 가끔 식품점이나 교회에서 그분을 뵙곤 했습니다. “안녕하세요”라는 짧은 인사 외에는 말씀이 거의 없으신 분. 제 기억 속의 미다할아버지는 늘 먼저 인사를 건네시고, 말 대신 미소만 지으시던 분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저 분이 미다 할아버지야” 하고 조용히 속삭이던 장면이 지금도 떠오릅니다. 1970년대 후반, 브라질 한인교회마다 부흥회가 잦던 시절에도 미다할아버지는 늘 그 자리에 계셨습니다. 한국 사람이 그리워, 한국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신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한인들의 보증을 많이 서 주었다가 재산을 거의 잃었다는 이야기, 예전에 있던 한인 유원지 역시 그분의 기증으로 마련되었다는 말도 뒤늦게 전해 들었습니다. 미다할아버지의 선행은 늘 이렇게 조용히, 뒤에서 알려졌습니다. 10년 전쯤, 그분의 이야기를 더 알고 싶어 수소문하던 중 IMOSP 신문에 미다할아버지의 삶이 연재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오지원 기자가 쓴 글을 통해 그분의 삶을 조금 더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미다할아버지를 기억하는 분들의 증언은 한결같았습니다. 어디를 가시든 먼저 남을 먹이던 분, 넘치는 것이 있으면 꼭 챙겨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던 분. 정작 본인은 늘 도시락을 싸 다니며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하셨다고 합니다. 저에게 허리가 아파 자주 치료를 받으러 오시던 한 권사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평생 편안한 얼굴을 본 분이 딱 두 분인데, 한 분은 암으로 투병하시던 분이고, 다른 한 분이 바로 미다할아버지셨어요.” 늘 웃으셨고, 늘 감사하셨고, 끝까지 사람을 기억하며 안부를 물으셨다고 합니다. 미다할아버지는 말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저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남을 위해 사는 것이 무엇인지, 조용한 선행이 얼마나 오래 남는지를. ...

Brasil, 50 anos de imigração - ⑩ Amigos, pessoas que conhe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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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Por que eu não tinha muitos amigos Desde pequeno, sempre fui uma pessoa introvertida. Até hoje não sei explicar exatamente por que não fazia muitos amigos. Vendo de forma positiva, eu era apenas quieto; de forma menos favorável, talvez fosse alguém que não sabia se aproximar primeiro. Talvez eu não sentisse tanta falta de amigos porque tinha quatro primos da mesma idade. Entre eles, sempre achei que eu era o mais fraco fisicamente e também o que tinha mais dificuldade nos estudos. Quando estava no primeiro ano do ginásio, na Coreia, fui apenas uma vez à casa de um amigo para comprar um pião. (risos) Justo quando eu começava a me aproximar um pouco mais das pessoas, não consegui concluir o segundo ano e, no ano seguinte, vim para o Brasil. ② Um começo sem entender a língua Cerca de um mês após chegar ao Brasil, ingressei na escola Anglo-Latino. Sem entender uma palavra do idioma, fui ajudado por estudantes coreanos que eu via pela primeira vez, sem qualqu...

브라질 이민 50년, 한 이민자의 삶을 돌아보다 – ⑩ 친구들, 사람으로 남은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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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친구가 많지 않았던 이유 어려서부터 나는 내성적인 편이었다. 왜 친구를 잘 만들지 않았는지는 지금도 정확히 모르겠다. 좋게 말하면 조용한 성격이고, 나쁘게 말하면 남에게 먼저 다가가지 않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친구가 크게 필요하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는 동갑 사촌이 네 명이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나는 체력이나 두뇌 면에서 늘 제일 뒤처진 편이라고 느끼며 자랐다. 한국에서 중학교 1학년 때, 팽이를 사고 싶어 친구 집에 간 적이 딱 한 번 있다. ㅎㅎ 이제 막 또래들과 조금씩 어울릴 수 있을 무렵, 중학교 2학년을 마치지 못하고 다음 해 브라질로 오게 되었다. ② 말도 통하지 않던 첫 시작 브라질에 도착한 지 한 달쯤 지나 Anglo-Latino 학교에 입학했을 때, 말 한마디 통하지 않던 나에게 처음 본 한국 학생들이 아무 조건 없이 다가와 도움을 주었다. 그중 홍일이라는 친구는 내 짝꿍이 되어 필요할 때마다 통역을 해 주었다. 단 한 번도 싫은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내가 워낙 말이 없는 성격이라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지만, 5년 동안 같은 반에서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늘 도움을 받기만 했던 나는 언젠가 꼭 이 친구에게 보답하고 싶다는 마음을 조용히 품고 지냈다. ③ 친구들 Osasco에 살던 Sung라는 친구도 있다. 나와 비슷한 나이인 것 같았지만 정확한 나이는 당시 끝내 알려주지 않았다. 거의 브라질 사람에 가까운 친구로, 굳이 비율을 따지자면 브라질 70%, 한국 30%쯤 된다고 본다. 주말이면 Sung 형제가 한 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와 토요일, 일요일을 거의 함께 보내곤 했다. 지금도 자주 본다. 얼마 전 내 생일에는 “브라질에서 50년 된 친구”라며 여럿이 함께한 식사비를 모두 계산했다. 나이가 들수록 철이 드는 친구다. ㅎㅎ 고맙다, 친구야. 또 한 명, 인 씨 성을 가진 친구가...

📌 Salvar na nuvem é fácil, mas apagar do jeito certo é mais importa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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Às vezes eu dou uma olhada no celular da minha esposa. O motivo é simples. Fotos e vídeos vão se acumulando, e fico preocupado que a falta de espaço acabe causando problemas no uso do celular. 🎥 Hoje em dia, os vídeos são maiores do que imaginamos Outro dia, ao ver um vídeo que ela gravou, fiquei surpreso. Um único arquivo tinha 200 MB . Pensei na hora: “Desse jeito, o espaço do celular acaba rapidinho…”. Hoje em dia as pessoas tiram muitas fotos e gravam ainda mais vídeos. Por isso, usar armazenamento extra , ou seja, um drive virtual , acabou se tornando algo natural. ☁️ Foi assim que começamos a usar o Google Drive Há alguns dias, com o objetivo de fazer backup das nossas fotos e vídeos, assinei o plano de 200 GB do Google Drive . É possível aumentar o espaço sempre que necessário Por enquanto, não precisamos de um plano maior Valor: R$ 15 por mês Até e...

📌 구글 드라이브를 쓰기 시작하면서 알게 된 한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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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 와이프의 휴대폰을 살펴본다. 이유는 단순하다. 사진과 동영상이 쌓여 용량 부족으로 휴대폰 사용에 문제가 생길까 봐서다 . 🎥 요즘 영상 파일, 생각보다 크다 예전에 와이프가 찍은 동영상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영상 하나가 200MB 였다. “이렇게 찍으면 금방 용량 다 차겠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요즘 사람들은 사진도 많이 찍고, 동영상은 더 자주 찍는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추가 저장 공간 , 즉 가상 드라이브 를 사용하게 된다. ☁️ 그래서 구글 드라이브를 쓰기 시작했다 며칠 전, 나와 와이프의 사진·동영상 백업을 목적으로 구글 드라이브 200GB 요금제 를 신청했다. 필요하면 언제든 용량 추가 가능 아직은 대용량까지 필요 없음 요금: 월 15헤알  (한국 기준 약 3,700원) 지금까지는 사진이나 영상을 직접 PC에 저장해 왔다. 하지만 솔직히 귀찮기도 하고, 이제는 가상공간을 활용하는 시대가 아닌가 싶었다. ※ AI 생성 이미지 ❗ 그런데, 관리 방식이 전혀 달랐다 가상 드라이브를 쓰면서 한 가지를 깨달았다. 내가 직접 관리하던 방식과 가상 드라이브를 활용하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내 컴퓨터, 내 휴대폰에서 내가 보고 판단해서 직접 삭제해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가상 드라이브는 다르다. 휴대폰, PC, 웹이 서로 동기화된 공간 이기 때문이다. 한 곳에서의 삭제는 다른 곳에도 그대로 영향을 준다. 🤖 AI와의 대화 속에서 얻은 깨달음 오늘 AI와 이런 대화를 나누며 확실히 깨달았다. 이제는...

Brasil, 50 anos de imigração - ⑨ A vida vista novamente entre a vida e a mor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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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encontro com o missionário Kang Myeong-gwan e a morte de minha mãe Mais importante do que como se morre, é como se vive Resumo Ao encontrar um missionário que atuava na Amazônia em meu consultório, pude ver como o peso da vida fica gravado no corpo. Esse encontro me fez recordar a morte de minha mãe e refletir sobre o que realmente importa: não como morremos, mas como vivemos. Uma pessoa encontrada no consultório Era por volta de 2013, talvez 2014. Um senhor de barba cheia, com aparência simpática, entrou no consultório. Sorria bastante e tentava aliviar o ambiente com piadas de tio. Ele parecia se divertir, mas, enquanto o atendia, eu começava a estranhar. Ele reclamava de desconforto no estômago e no pescoço. Ao examiná-lo, percebi uma hérnia cervical. Os dois joelhos doíam há muito tempo ao redor da patela, a visão não estava boa, e havia dores na lombar, nos ombros e nos cotovelos… Não era um ou dois pontos: o corpo inteiro estava desgastado. “Que 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