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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이민 50년, 한 이민자의 삶을 돌아보다 – ⑯ 웃음으로 문을 열어 준 곳 ― 작은 예수회

 

2014년 8월 23일 토요일 오후, 작은 예수회를 가다

2024년 4월, 대구 앞산전망대의 수녀님 사진 

2014년 8월 23일 토요일 오후, 나는 봉헤찌로에 있는 **작은 예수회**를 방문했다.
전화를 드렸더니 “언제든지 오시면 돼요” 하고 웃으며 말씀해 주신 분은, 최근 새로 오셨다는 정미영 테레자(Tereza) 수녀님이었다.

“언제든 오면 된다”는 이 한마디.
참 낯설면서도 감사하게 들렸다.
왜냐하면 과거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 자신의 공간과 시간을 지켜온 곳, 그래서 3년이 걸렸다

2010년 5월, 한인회보에 작은 예수회를 소개한 적이 있다.
당시 작은 예수회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브라질 땅에서 현지인들을 위해 봉사하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름과 주소를 소개 차원에서 올렸던 기억이다.

이후 직접 방문해 혹시라도 더 도울 일이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드려 방문 날짜를 상의했지만,
주말 외에는 시간이 어려운 나에게 돌아온 답은 단호했다.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은 방문이 안 됩니다.”
당시 작은 예수회를 맡고 계시던 원장 수녀님의 말이었다.

이후 한 번 더 전화를 드렸지만 결과는 같았고,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더 이상 전화를 하지 않으려 했는데,
이번에는 테레자 수녀님과 인연이 닿았는지
생각보다 쉽게 방문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테레자 수녀님의 첫인상은
웃음과 평안 그 자체였다.
작은 예수회 안뜰에 있는 예수님 동상의 얼굴이
수녀님과 닮아 보였던 것은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내 마음이 그렇게 보이게 한 것일까.


❖ 조용히 이어지고 있던 돌봄의 현장

당시 브라질의 작은 예수회는

  • 65세 이상, 연고 없는 어르신들을 위한 무료 양로원을 운영하고 있었고

  • 행려인들에게 아침과 점심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었다.

작은 예수회는 거리에서 행려인들을 맞지 않았다.
안에 있는 큰 식당으로 모셔
차분하게 식사를 대접하고 있었다.

“예수님을 대접하는 마음으로 합니다.”
수녀님의 이 말은
그저 말로만 들리지 않았다.

이 장면을 보며,
봉헤찌로에서 7년 넘게 행려인 봉사를 하던
한인 부부가 떠올랐다.
이 부부 역시 매일 저녁 5시가 되면
Tres Rios 성당 앞에서 음식을 나누던 분들이었다.

‘브라질에는 이렇게
조용히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참 많구나.’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다.


❖ “제일 걱정되는 건 바닥이에요”

무엇이 가장 필요하냐고 여쭈었을 때,
테레자 수녀님의 답은 뜻밖에도 바닥이었다.

어르신들 중에는 휠체어를 사용하시거나
몸이 불편하신 분들이 많았는데,
방과 거실이 모두 시멘트 바닥이라
혹시 넘어지면 크게 다치실까 늘 마음이 쓰인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한인사회에 전했더니,
당시 Rua Prates에 있던 서울식품점 아주머니께서
“전에 뜯어 놓은, 거의 새것과 다름없는
나무 바닥재가 있는데 필요하면 가져가라”고 하셨다.

하지만 양이 턱없이 부족해,
결국 한인들의 정성을 모아
한국에서 수입한 고무 바닥재를 설치하게 되었다.


❖ 수녀님들의 방, 그리고 또 한 번의 마음 쓰임

설치가 잘 되었는지 확인하러 갔다가
처음으로 수녀님들의 숙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공간에 남자가 들어오는 건 처음이에요.”
수녀님은 웃으며 말씀하셨지만,
따라 웃던 나는 곧 마음이 무거워졌다.

수녀님들의 방과 거실, 화장실까지
모두 어르신들 공간과 똑같은 시멘트 바닥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찬 바닥은 여성분들께 좋지 않겠는데요?”
말씀드렸더니 수녀님들은
“우리는 괜찮다”며 웃으셨다.
그 웃음이 오히려 더 안쓰러웠다.

그때 문득,
서울식품 아주머니가 주시려던
나무 바닥재가 떠올랐다.


❖ 교회와 성당을 넘어선 손길

문제는 사람이었다.
쓰던 자재는 설치를 기피하는 경우가 많아
작업자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 영광교회 성도 두 분
선뜻 “우리가 하겠다”고 나서주셨다.
공휴일을 이용해 이틀을 꼬박 작업한 끝에,
수녀님들의 방과 거실은
한결 따뜻한 공간이 되었다.

수녀님들이 행복해하시는 모습에
오히려 우리가 더 행복해졌다.

이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분명했다.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어준 사람들,
종교를 따지지 않고
어려운 이웃을 먼저 본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 다시 이어진 인연

이후 LA의 작은 예수회를 방문하기도 했고,
2024년에는 한국에 나가
작은 예수회 대구분원에서
그동안 안부를 나누던 테레자 수녀님과 재회했다.

브라질에서 사역하시다
작은 예수회 원장 수녀로 한국에 오셨고,
“원장은 몇 년마다 투표로 선출된다”는 말씀에서
수녀회 안에도 책임과 나눔의 원칙이
분명히 살아 있음을 느꼈다.

지금도 몸이 힘든 가운데서도
대구분원에서 정신적으로 어려운 이들을
묵묵히 돌보고 계신다는 소식을 전하며
이 기록을 마친다.

“예전에 올렸던 자료들이 온라인에서 사라져, 이번에는 최근에 다시 촬영한 사진들로 글을 채웠습니다.”


❖ 작은 예수회의 설립 이념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한 3,30)

작은 예수회는 인간은 모두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정하며,
장애와 비장애의 구분을 넘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기쁨을 나누는 공동체를 지향합니다.

▶ 다음 이야기 예고

다음 글에서는,
브라질 우범지역에 위치한 Jandira 선교지에서
청소년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함께했던 시간을
이민 50년의 또 다른 기억으로 기록해 보려 합니다.

※ 이 글은 ‘브라질 한인 이민 50년’ 연재 글입니다.

브라질 이민 50년, 한 이민자의 삶을 돌아보다 – ⑭ 한 사람의 선택이 만든 역사

브라질 이민 50년을 살며, 한 권의 책에서 마주한 역사

브라질 이민 50년을 살며 나는 브라질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을 지켜보아 왔다.
그중 하나는 마리아 수녀회를 방문한 뒤에야 비로소 제대로 이해하게 된 이야기다.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다

마리아 수녀회를 방문하고 돌아오며 수녀님 한 분이 조용히 책 한 권을 건네주셨다.
제목은 『마리아 수녀회 40년사』.
두툼한 책이었고, 솔직히 처음에는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다 헤아릴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몇 장을 넘기기도 전에 책을 덮을 수 없었다.
그 안에는 내가 알지 못했던, 그러나 반드시 기록되어야 할 이야기들이 차분히 정리되어 있었다.

‘영화숙’이라는 이름

책 속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단어는 ‘영화숙’이었다.
처음에는 오래된 시설 이름쯤으로 여겼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 이름이 지닌 무게를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17년 전, 이해하지 못했던 한 이야기

그때 문득 오래전 한 어르신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약 17년 전, 알파빌리에 거주하던 연세가 여든을 훌쩍 넘긴 한 어르신이
자신이 젊은 시절 ‘영화숙’을 관리하던 사람이었다고 담담히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치료가 끝난 뒤 인터넷을 통해 여러 차례 찾아보았지만 관련된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고,
그 이야기는 그렇게 내 기억 속에 조용히 묻혀 있었다.

그런데, 이게 사실이었다

수녀님이 건네주신 『마리아 수녀회 40년사』 속에서 다시 ‘영화숙’이라는 이름을 마주하는 순간,
그때 들었던 그 어르신의 말이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이것은 사실이었다.

지금도 ‘영화숙’에 대한 기록은 단편적으로만 남아 있다.
일부 인권유린에 대한 언급은 있으나,
전쟁 직후 한국에 들어온 한 신부와 수녀들의 선택이 아이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한 신부의 선택

이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는 소 알로이시오 몬시뇰 신부가 있었다.
말도 통하지 않고, 문화와 생활 방식도 전혀 다른 나라.
전쟁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던 한국에서 그는 아이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이 글에서 그의 업적을 하나하나 열거하지는 않으려 한다.

사진 몇 장 속에 담긴 장면만으로도,
한 사람이 평생을 걸어 만들어 온 시간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기를 바란다.


1970년대, 전쟁과 가난으로 수많은 고아들이 생겨났고

그 아이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영화숙’이라는 곳에 사실상 가두어져 있었다.

그곳에서는 심각한 인권유린이 자행되고 있었다고 한다.
이 상황 앞에서 마리아 수녀회는 백만 명 서명운동을 벌였고,
수많은 방해와 폭력 속에서도 결국 301명의 아이들을 그곳에서 데리고 나왔다.

삶을 다시 만들어 주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먹을 것, 입을 것, 잠잘 곳이 필요했고, 무엇보다 교육이 필요했다.

국민학교에서 중학교, 고등학교, 실업학교, 그리고 대학까지.
아이들은 배우고, 일하고, 사회의 구성원으로 성장해 갔다.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며, 더 이상 보호의 대상이 아닌
자립한 삶의 주체가 되었다.

한국을 넘어, 그리고 지금

알로이시오 몬시뇰 신부의 선종 이후에도 이 사역은 멈추지 않았다.
미카엘라 수녀를 비롯한 수녀들이 그 뜻을 이어
활동은 필리핀, 멕시코, 과테말라를 거쳐 브라질로 확장되었다.

상파울루 성베르나르도, 그리고 수도 브라질리아까지.
오늘도 수백, 수천 명의 아이들이 숙식과 교육을 무상으로 제공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나는 단순한 기록자가 아니라,
직접 보고 확인한 목격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 본문에 사용된 사진 자료는 2011년 마리아 수녀회 부산 분원의 허락을 받아 사용한 자료입니다.
과거에 공개되었던 일부 자료가 유실되어 완전하지는 않으나, 다시 정리해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습니다.

마리아 수녀회의 이야기는 과거의 미담이 아니다.
지금도 계속 쓰이고 있는 역사이며, 반드시 다음 세대에게 전해져야 할 기록이다.


🔔 다음 이야기 예고

다음 글에서는 또 다른 사람들을 조명하려 한다.

돌이켜보면, 내 삶에서의 도움은 언제나 예상치 않은 곳에서 찾아왔다.

계속해서 ‘좋은 이야기’만을 잇기보다, 조금 다른 결의 이야기를 한 번 꺼내 보려 한다.

브라질 이민 50년, 한 이민자의 삶을 돌아보다 – ⑬ 그렇다면, 이곳은 도대체 어떤 곳?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내가 알고 있던 ‘학교’의 이미지가 완전히 깨지는 것을 느꼈다.

외딴 동네, 구석진 위치. 겉에서 보았을 때는 짐작하기 어려웠던 공간이 안으로 들어오자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조용히 일한다”는 말이 이렇게까지 철저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상상과 전혀 달랐던 내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넓고 정돈된 공용 공간이었다.

대기실은 예상보다 훨씬 컸고, 많은 사람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었다. 병원이나 공공기관에서 보던 공간보다도 오히려 더 단정해 보였다.

이곳이 단순히 아이들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는 사실은 곧바로 드러났다.

치과 진료실이 두 곳, 그리고 내과·소아과·침구 치료를 위한 진찰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모두 무료로 운영된다고 했다.

시설은 ‘최소한’이 아니라 ‘충분함’에 가까웠다.


학교이면서, 병원이었고, 삶의 공간이었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아이들이 공부하는 교실들이 이어졌다.

교실, 도서실, 소강당, 컴퓨터 교실, 그리고 봉제실까지.

공부만 시키는 곳이 아니라 아이들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삶의 기술을 가르치는 공간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남았다.

아이들이 만든 도자기, 손으로 뜬 작품들, 종이로 만든 묵주까지.

이 공간이 얼마나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 아이들과 함께 만들어졌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졌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내가 가장 놀랐던 것은 아주 사소해 보일 수 있는 부분이었다.

화장실이 유난히 깨끗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화장실을 너무 지저분하게 써서 청소가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공간을 어떻게 쓰는가’를 차분히, 반복해서 가르쳤다는 말이었다.

청소까지 직접 도맡아 하시는 수녀님들의 모습에서 이곳이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가 가장 분명하게 보였다.


그래서, 이곳은 어떤 곳이었을까

이곳은 단순한 학교도, 단순한 복지시설도 아니었다.

아프면 치료받고, 배우고, 기도하고, 놀고, 생활하는 곳.

아이들의 하루 전체를 조용히, 그러나 책임감 있게 감싸고 있는 공간이었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절대 허술하지 않은 곳.

그날 내가 받은 놀라움은 건물의 규모 때문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말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 이 글은 2011년 3월 6일, 직접 방문하여 보고 느낀 기록과 사진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 이 글은 ‘브라질 한인 이민 50년’ 연재 글입니다.


🔔 다음 이야기 예고

이곳을 만든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리고 왜 이런 일은
그의 이름과 함께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을까.

다음 글에서는
마리아 수녀회를 창설한 한 신부의 삶과 선택,
그리고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야기를 다루려 한다.

〈3편 : 한 사람의 선택이 만든 역사〉로 이어집니다.

브라질 이민 50년, 한 이민자의 삶을 돌아보다 – ⑫ 어쩌다 나는 그곳에 가게 되었을까

 사실 내가 한인회 일을 돕게 된 이유는 거창하지 않았다.

내 성격상 한인회와 엮일 일은 원래 없었다.

다만 그 자리에 오랜 친구, ‘홍일이’가 있었다.
마음에 빚처럼 남아 있던 친구였고,
그래서 그 형의 부탁을 끝내 외면하지 못했다.
어쩌면 친구에게 진 빚을 다른 방식으로 갚는 일이라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 한인회 홍보였고,
이내 한인회보 제작까지 맡게 되었다.
회보에 실을 내용을 찾다 보니 자연스럽게
브라질 사회 속에서 묵묵히 좋은 일을 하는 한인들을 찾아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그분들의 이야기를 우리 한인들에게 전해
조용히, 그러나 깊게 가슴을 울리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한인회의 문화부회장이던 Lisa 님을 통해
‘마리아 수녀회’라는 곳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썽베르나르도 쪽에,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학교가 있다는 말이었다.


2011년 3월 6일

GPS에 주소를 찍고 길을 나섰다.
일요일이라 도로는 한산했지만,
도시를 벗어나자 길은 점점 낯설어졌다.

‘이런 곳에 학교가 있을까?’

솔직히 반신반의했다.
쌍베르나르도(São Bernardo) 시 안으로 들어왔지만
골목을 몇 번이나 헤매야 했고,
길 끝자락에 다다랐을 때도 확신은 들지 않았다.
(당시 GPS는 지금처럼 정확하지 않아 오류가 잦았다.)

‘설마 저기는 아니겠지.’
이런 구석진 곳에 제법 반듯한 출입구를 가진 건물이 보였지만
처음엔 그냥 지나쳤다.
차에서 내려 가까이 다가가
문 앞에 붙은 작은 안내문을 보고서야
내가 찾던 곳이 맞다는 걸 알았다.

일요일이라 문은 닫혀 있었고,
인터폰으로 떼레자 수녀님을 만나러 왔다고 전하자
잠시 후 문이 열렸다.


들어서는 순간

수녀님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솔직히 말해 조금 당황했다.

외딴 동네, 구석진 곳.
그런데 그 안에 들어선 건물은
내가 상상하던 ‘조그만 학교’와는 전혀 달랐다.

신축 건물, 길게 이어진 복도,
정갈하고 단정한 내부.

‘여기가… 맞나?’


수녀원인지, 학교인지, 병원인지
한눈에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첫인상, 그리고 묘한 감정

전화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외부에 알리지 않고 조용히 일을 합니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드러내지 않지만,
결코 대충 하지 않는 곳.

아직 내부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기도 전인데
이곳은 ‘말보다 현장’이 먼저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은 취재를 하러 갔다기보다는,
어쩌면 그냥 보러 간 것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이 첫인상만으로도
이곳은 그냥 지나칠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판단은,
안으로 더 들어갈수록
점점 확신으로 바뀌게 된다.


※ 이 글은 2011년 3월 6일,
직접 방문하여 촬영한 사진과 기록을 바탕으로 합니다.
15년 전 작성했던 글을,
AI의 도움을 받아
‘이민 50년의 기록’으로 다시 정리해 올립니다.

※ 이 글은 ‘브라질 한인 이민 50년’ 연재 글입니다.


🔔 다음 이야기 예고

그날, 나는 단순히 학교를 보러 간 것이 아니었다.
그 안에서 ‘왜 이런 이야기를 우리는 몰랐을까’라는
질문을 처음 품게 되었다.

다음 글에서는
마리아 수녀회 내부에서 내가 직접 본 것들,
그리고 그곳이 왜 ‘조용히 일하는 곳’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2편 : 그날, 그 안에서 본 것들〉로 이어집니다.

브라질 이민 50년, 한 이민자의 삶을 돌아보다 – ⑪ 웃으며 살다, 웃으며 떠난 사람들

 

 내가 아는 쌀 할아버지, 미다할아버지

한인분들은 그분을 미다할아버지, 혹은 쌀 할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저는 1976년에 이민을 왔는데, 가끔 식품점이나 교회에서 그분을 뵙곤 했습니다.

“안녕하세요”라는 짧은 인사 외에는 말씀이 거의 없으신 분.
제 기억 속의 미다할아버지는 늘 먼저 인사를 건네시고,
말 대신 미소만 지으시던 분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저 분이 미다 할아버지야” 하고
조용히 속삭이던 장면이 지금도 떠오릅니다.

1970년대 후반, 브라질 한인교회마다 부흥회가 잦던 시절에도
미다할아버지는 늘 그 자리에 계셨습니다.
한국 사람이 그리워, 한국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신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한인들의 보증을 많이 서 주었다가
재산을 거의 잃었다는 이야기,
예전에 있던 한인 유원지 역시
그분의 기증으로 마련되었다는 말도
뒤늦게 전해 들었습니다.

미다할아버지의 선행은 늘 이렇게
조용히, 뒤에서 알려졌습니다.

10년 전쯤, 그분의 이야기를 더 알고 싶어 수소문하던 중
IMOSP 신문에 미다할아버지의 삶이 연재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오지원 기자가 쓴 글을 통해
그분의 삶을 조금 더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미다할아버지를 기억하는 분들의 증언은 한결같았습니다.
어디를 가시든 먼저 남을 먹이던 분,
넘치는 것이 있으면 꼭 챙겨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던 분.
정작 본인은 늘 도시락을 싸 다니며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하셨다고 합니다.

저에게 허리가 아파 자주 치료를 받으러 오시던
한 권사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평생 편안한 얼굴을 본 분이 딱 두 분인데,
한 분은 암으로 투병하시던 분이고,
다른 한 분이 바로 미다할아버지셨어요.”

늘 웃으셨고, 늘 감사하셨고,
끝까지 사람을 기억하며
안부를 물으셨다고 합니다.

미다할아버지는 말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저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남을 위해 사는 것이 무엇인지,
조용한 선행이 얼마나 오래 남는지를.

미다할아버지의 선행은
오늘도 많은 브라질 한인들의 기억 속에
조용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웃고 떠난 사람, 엘림학교 김재진 원장님


김재진 원장님은 대단해 보이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포르투갈어도 유창하지 않았고,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해 답답할 때도 많았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오히려
누군가의 도움이 더 필요해 보이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선택한 삶은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딸 윤재를 먼저 떠나보냈습니다.
백혈병이었습니다.
윤재의 꿈은 불우한 아이들을 가르치며 사는 것이었고,
김재진 원장님은 그 아이가 못다 이룬 꿈을
자신의 남은 인생으로 이어가기로 했습니다.

1997년, 그렇게 엘림학교가 시작되었습니다.

Tatuapé 지역의 작은 공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먹이고, 재우는
고단한 일상이 이어졌습니다.

시설은 늘 부족했습니다.
낡은 책상과 오래된 컴퓨터,
아이들 낙서로 지워지지 않는 벽,
정리할 공간이 없어
쌓아둘 수밖에 없는 이불과 물건들.

하지만 아이들은 그 안에서
공부를 했고,
태권도를 배웠고,
그림을 그리고 웃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감당하기 힘든 삶이었습니다.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어질 때가 많았고,
도움을 주고 돌아오는 길은
늘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사실,
자신의 꿈이 아닌 딸의 꿈을 이루기 위해
끙끙대며 살아가는 그분의 모습은
사람의 눈으로 보기엔
편안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떠나는 그 마지막 모습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일이 있어 밤 11시쯤 안치소에 도착했을 때,
다른 안치소에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김재진 원장님이 계신 곳은 조용했고
문은 닫혀 있었습니다.

꽃을 드리기 위해
김 원장님 얼굴을 뵌 순간,
저는 놀랐습니다.

살아 계실 때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미소를 지은 얼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얼굴은
다른 사람의 얼굴에서는 본 적 없는,
참으로 행복한 모습이었습니다.

아마도
다시 만날 딸을 생각하시며
미소 지으셨던 것은 아닐까,
조심스레 그렇게 생각해 봅니다.


미다할아버지는
평생을 웃으며 살다 가신 분이었고,
김재진 원장님은
웃으며 떠나는 모습을 보여주신 분이었습니다.

두 분 모두
자신들의 삶의 태도
사람들 마음에 남았습니다.

지난번에는
어떻게 죽느냐보다,
어떻게 살아왔는가가 더 중요하다
는 것을 깨달았다면,

이번에 제가 얻은 교훈은 이것입니다.

잘 산 인생이란
떠날 때 어떤 얼굴로 기억되느냐라는 것.

그리고 가능하다면,

“떠날 때,
가장 환한 얼굴일 수 있다면.”

다음 글에서는,
브라질 한인 이민사에서 빼놓을 수 없지만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은 마리아 수녀회의 이야기
기록해 보려 합니다.
※ 이 글은 ‘브라질 한인 이민 50년’ 연재 글입니다.

브라질 이민 50년, 한 이민자의 삶을 돌아보다 – ⑩ 친구들, 사람으로 남은 기억

  ▶ [브라질 한인 이민 50년 전체 글 목록 보기]


① 친구가 많지 않았던 이유

어려서부터 나는 내성적인 편이었다.
왜 친구를 잘 만들지 않았는지는 지금도 정확히 모르겠다.
좋게 말하면 조용한 성격이고,
나쁘게 말하면 남에게 먼저 다가가지 않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친구가 크게 필요하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는
동갑 사촌이 네 명이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나는 체력이나 두뇌 면에서
늘 제일 뒤처진 편이라고 느끼며 자랐다.

한국에서 중학교 1학년 때,
팽이를 사고 싶어 친구 집에 간 적이 딱 한 번 있다. ㅎㅎ
이제 막 또래들과 조금씩 어울릴 수 있을 무렵,
중학교 2학년을 마치지 못하고
다음 해 브라질로 오게 되었다.


② 말도 통하지 않던 첫 시작

브라질에 도착한 지 한 달쯤 지나
Anglo-Latino 학교에 입학했을 때,
말 한마디 통하지 않던 나에게
처음 본 한국 학생들이
아무 조건 없이 다가와 도움을 주었다.

그중 홍일이라는 친구는 내 짝꿍이 되어
필요할 때마다 통역을 해 주었다.
단 한 번도 싫은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내가 워낙 말이 없는 성격이라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지만,
5년 동안 같은 반에서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늘 도움을 받기만 했던 나는
언젠가 꼭 이 친구에게 보답하고 싶다는 마음을
조용히 품고 지냈다.


③ 친구들

Osasco에 살던 Sung라는 친구도 있다.
나와 비슷한 나이인 것 같았지만
정확한 나이는 당시 끝내 알려주지 않았다.
거의 브라질 사람에 가까운 친구로,
굳이 비율을 따지자면
브라질 70%, 한국 30%쯤 된다고 본다.

주말이면 Sung 형제가
한 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와
토요일, 일요일을 거의 함께 보내곤 했다.
지금도 자주 본다.

얼마 전 내 생일에는
“브라질에서 50년 된 친구”라며
여럿이 함께한 식사비를 모두 계산했다.
나이가 들수록 철이 드는 친구다. ㅎㅎ
고맙다, 친구야.

또 한 명, 인 씨 성을 가진 친구가 있다.
여린 독불장군 같은 성격이지만 정이 깊고,
무슨 일이든 손으로 만들어내는 특별한 재주가 있다.

판데믹 시기,
병원에서 쓰는 안면 보호대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에
“한번 만들어 봐라”는 말에
정말로 뚝딱 만들어 왔다.

약 1,000개를 제작해 무료로
봉헤찌로와 상파울루 중심 인근 보건소에 전달할 수 있었고,
한인회를 통해
우리 한인들의 위상을 높이는 데 함께 기여했다.

코로나 시기, 상황은 매우 급박했다.
브라질에서는 마스크조차 부족한 때였고,
의사들은 보호 장비도 없이
환자를 직접 마주해야 했다.

그 무렵, TV 화면을 통해
해외에서 의료진이 사용하는 안면 보호대를 처음 보게 되었다.
이후 보호대를 제작하면서,
치과 의사인 Dra. Kim을 모델로 촬영한 장면이 있었는데,
사진을 찾아보면 어딘가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중 진행된 지원 활동에 대해
공식적으로 전달된 감사패다.

이 결과는 한 개인의 일이 아니라,
한브네트(koreabrazil.net, 현재는 사라진 공간)을 중심으로
말없이 함께해 준 여러 사람들의 손길이 모여
비로소 가능했던 일이었다.


④ 힘들던 시절, 나를 붙잡아 준 사람들

돌아보면,
한국에서 한의과를 다니며
공부가 힘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에도
나를 붙잡아 주던 사람들이 있었다.

재필 형, 환진 형, 법진 형,
그리고 이름을 다 적지 못할 또 다른 여럿….
그들의 도움을
나는 늘 마음에 담고 살아왔다.


⑤ 도움은 다시 사람에게로

브라질에 와서
말도 통하지 않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는 참 많은 도움을 받으며 살아왔다.

그래서 늘 생각했다.
내가 받은 도움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도움을
다른 사람들에게 돌려주며 살아야겠다고.

브라질의 한인사회는 참 정이 많은 사회였다.
그 안에는 사람이 있었고,
이름을 앞에 내세우지 않아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


🔔 다음 이야기 예고

다음 글에서는
한 사람의 얼굴이 먼저 떠오르는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이곳 한인사회에서
말없이 자신의 손을 먼저 내민 미다 할아버지,
그리고 슬픔의 아픔을 뒤로하고
아이들을 품으며 살아왔던
엘림학교 김재진 원장님의 이야기다.

※ 이 글은 ‘브라질 한인 이민 50년’ 연재 글입니다.


브라질 이민 50년, 한 이민자의 삶을 돌아보다 – ⑨ 삶과 죽음 사이에서 다시 바라본 삶

 ▶ [브라질 한인 이민 50년 전체 글 목록 보기]


강명관 선교사와의 만남과 어머니의 죽음

어떻게 죽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


요약
아마존 선교사를 진료실에서 만나며, 삶의 무게가 몸에 남긴 흔적을 보게 되었다.
그 만남은 어머니의 죽음을 다시 떠올리게 했고,
어떻게 죽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를 묻게 했다.



진료실에서 만난 한 사람

2013년, 아니면 2014년쯤이었을 것이다.
수염이 더부룩한, 인상 좋은 아저씨 한 분이 한의원에 오셨다.
잘 웃고, 아재 개그도 섞어가며 분위기를 풀려 하셨다.
본인은 재미있어 하셨지만, 나는 진료를 하며 점점 고개를 갸웃하게 되었다.

속이 불편하다 하셨고, 목도 불편하다 하셔서 살펴보니 경추 디스크가 있었다.
무릎은 양쪽 모두 오래전부터 슬개골 주변 통증이 있었고,
눈도 좋지 않고, 허리·어깨·팔꿈치까지…
한두 군데가 아니라 몸 전체가 망가져 있었다.

‘이분은 대체 무슨 일을 하시길래 이렇게 아프신 걸까.’


아마존 선교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

직업을 여쭤보니, 아마존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라고 하셨다.
그제야 이 몸 상태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아마존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을 적지 않게 보아 온 나로서는,
‘선교를 한다’는 말만으로 누군가를 쉽게 좋게 보지는 않게 되었다.
들어갔다가 얼마 못 버티고 포기하고 나오는 사람도 있었고,
안타깝게도 제도나 현실을 이용하려는 모습들을 보아 온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브라질은 전통적으로 천주교 국가이며,
종교인에 대해서는 사회적으로도, 제도적으로도 비교적 관대한 나라다.
정식으로 브라질에 입국해 영주권을 취득하는 여러 경로 가운데
종교 활동을 통한 체류는 행정적으로 비교적 수월한 편에 속해 왔다.

목사나 선교사의 경우,
소속 교회에서 초청장을 받으면 비교적 쉽게 입국이 가능했고,
그 과정이 영주권 취득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런 배경 속에서 한동안 아마존 선교는
신앙과 사명, 그리고 현실적 목적이 뒤섞인 공간이기도 했다.

이러한 흐름이 반복되면서 현재는
아마존 선교를 목적으로 인디언 부족 지역에 들어가기 위해
까다로운 허가 절차와 여러 제약을 거쳐야 한다.

그만큼 아마존은,
말처럼 낭만적이거나 누구나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아마존이라는 삶의 자리

전기 없는 곳에서 쪼그리고 앉아 글을 쓰고,
위생이 좋지 않은 환경에서 수년을 지내다 보니
무릎, 허리, 눈, 위장, 귀까지 하나둘 탈이 난 것이다.
말 그대로 몸으로 살아낸 삶의 흔적이었다.

그분은 미국에 본부를 둔 위클리프 성경번역 선교회 소속으로,
아마존의 수많은 인디언 부족 가운데
바나와 부족이 사는 섬에 들어가
그들의 언어로 성경을 만드는 일을 하고 계셨다.

마나우스를 거쳐 경비행기를 타고 두 시간,
약 200명 남짓한 인디언들이 사는 고립된 섬.
몇 달씩 그곳에서 생활하며 글을 만들고,
센터로 나와 정리한 뒤 다시 섬으로 들어가는 삶을 반복하신다고 했다.

먹을 것이 부족한 섬에서 하루 한두 끼를 겨우 먹다가
상파울루에 나오면 음식이 다 맛나게 보여
오시면 과식으로 늘 문제가 되신다.
그분의 몸은 ‘종합병원’이라는 말로 표현을 대신한다.

바나와 부족의 언어로 성경을 만드는 작업은
한 사람의 시간만으로는 끝나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아마존에서는 한 선교사가 작업을 마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뒤,
그 일을 아내나 자녀가 이어받아 완성한 경우도 적지 않다고 들었다.
말 그대로, 한 세대의 일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작업이다.

강명관 선교사님의 경우에도
오랜 시간에 걸친 바나와 부족 성경 번역 작업을 마무리하셨고,
그 긴 여정은 하나의 사명으로, 또 하나의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한 일을 끝낸 뒤에도 그의 삶은 멈추지 않았다.
현재는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자리를 옮겨,
아이들과 함께하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다고 들었다.
사역의 형태는 달라졌지만,
사람 곁에 머무는 삶이라는 방향은 여전히 같아 보였다.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남아 있던 질문

1년에 한두 번 정도 치료하며 가까워진 어느 날,
나는 오래 마음에 남아 있던 질문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2009년 1월 5일 새벽,
어머니는 집에 들어온 강도에게 총을 맞고 돌아가셨다.
브라질에 와서 늘 느끼던 치안에 대한 불안이
결국 우리 가족에게도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그 후 나는 6개월을 고민했다.
치안이 더 나은 미국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이 땅에 남을 것인가.
미국 영주권도 있었기에 선택은 더 무거웠다.

결국 나는 브라질에 남기로 했다.
두려움보다, 이 땅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죽음을 마음으로 정리하는 일은
그 결정 이후에도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어머니가 이렇게 돌아가셨는데,
목사님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그분은 잠시 생각하더니 조용히 말했다.
자신 역시 아마존의 고립된 섬에서
표범과 독사, 그리고 댕기열과 황열병 같은 질병에 늘 노출된 채
언제, 어떤 모습으로 죽게 될지 모르는 삶을 살고 있다고.

사람이 어떻게 죽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그 말은 짧았지만,
그 이후의 생각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삶을 다시 바라보게 된 한 문장

진료실에서 목사님을 보내고 난 뒤,
내 안에 오래 남아 있던 질문 하나가 사라지고
다른 생각 하나가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어떻게 죽느냐보다,
어떻게 살아왔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


이 글은 그 사실을
내 삶의 자리에서 다시 확인하게 해 준 기록이다.

다음 글에서는

브라질에서 만난 친구들의 이야기를 이어가려 한다.

※ 이 글은 ‘브라질 한인 이민 50년’ 연재 글입니다.

브라질 이민 50년, 한 이민자의 삶을 돌아보다 ⑧ 김학종 목사님 이야기

  ▶ [브라질 한인 이민 50년 전체 글 목록 보기]


김학종 목사님 부부와 아버지·어머니 (1980년대)

브라질 이민 초기,
교회는 단순한 종교 공간이 아니었다.
그곳은 사람이 사람을 만나
버텨낼 힘을 얻던 자리였다.

그 중심에는
말없이 자기 몫을 감당하던 목회자들이 있었고,
그중 한 분이
김학종 목사님이었다.


목자 없는 교회에 들어오다

가나안교회와 남미교회가 하나로 합쳐진 뒤,
교회는 한동안 방향을 잃은 상태였다.
담임목사는 갑작스럽게 사임했고,
재정은 바닥이었으며,
규모도 작아
선뜻 맡으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김학종 목사님이
이 교회를 맡겠다고 나섰다.

조건은 단순했다.
2년간 무보수.

말은 쉬웠지만,
실제로 그렇게 사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아무것도 필요치 않던 사람

김 목사님은
자신을 위해 요구하는 것이 없었다.
당시 값이 꽤 나가던 Yamaha 올갠을 직접 구입해
교회에 기증했고,
생활비도 받지 않고 지냈다.

교인들 대부분은
목사님의 실제 생활형편을 알지 못했다.

무보수로 사역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무 내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저
“목사님은 형편이 괜찮은 분이겠지”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김 목사님을 보아왔던 나

그 시절,
나는 교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성가대를 돕고
주보를 만들었다.

목사님의 첫째와 둘째는 나와 나이가 비슷해
자연스럽게 친구처럼 지냈다.
장로에서 목사가 되신 분이어서인지
유머 감각도 있으셨지만,
강단에서는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던 분이었다.

영광교회는
3~4년 사이 눈에 띄게 성장했고,
우범지역이던 옛 한인촌을 떠나
현재의 Pari 지역으로 이전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 목사님은
조용히 미국으로 떠났다.
자신의 몫을 마친 뒤,
교회가 더 성장하길 바라면서였다.


떠난 뒤에야 보였던 삶

미국으로 가시기 전,
김 목사님 댁의 이삿짐을 도운 적이 있다.
그 집에는 침대가 없었고,
일인용 매트리스 몇 개와
최소한의 물건만 있었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김 목사님은
정말로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교회를 위해 살았다는 것을.


미국에서도 같았던 선택

김 목사님은
미국 LA에 있는 교회에서도
담임을 맡았지만,
그곳에서도 무보수였다.

어느 날,
목사님 댁에서
브라질에 있던 둘째 아들 김성현이 보낸
편지를 읽게 되었다.

국제전화비가 비싸던 시절,
서툰 한글로 적힌 그 편지에는
브라질에서 교회를 섬기던 당시
집에 먹을 것이 없어
셋째가 Feira(시장)에서
사람들의 짐을 들어주고 받은 돈으로
빵을 사 먹으며 울었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목사님은
아이들에게조차
그 어려움을 내색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이들도 아버지의 뜻을 알았는지,
사람들, 그리고 교인들 모두
이런 힘든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끝까지 강단에 섰던 사람

김학종 목사님은
간암으로 강단에서 쓰러질 때까지
설교를 멈추지 않았다.

재수술 후
몸에 힘이 거의 남지 않았을 때도
가능한 한 강단에 섰다.

그분에게
목회는 직업이 아니었다.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생각 정리

1970년대를 중심으로
브라질 한인 사회에는
책임감과 사명감을 함께 지닌
목회자들이 존재했다.

영주권 문제와
생활의 불안이 공존하던 시절,
사람들은 믿음으로 버텼고
교회는 그 버팀의 중심에 있었다.

자신을 아끼지 않는
한 목회자의 삶이
한인 교계를 지탱하는
한 축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김학종 목사님의 이야기는
한 개인의 미담이 아니라,
한 시대가 어떻게 버텨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라
나는 생각한다.


이제 이민의 시간은
조금씩 다른 국면으로 들어선다.
낯섦 속에서 사람을 알아보고,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얼굴이 생기고,
조심스럽게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기기 시작한다.

다음 이야기에서는,
브라질 땅에서
친구가 생기고,
삶에 조금씩 여유가 스며들던 과정

기억 속에서 꺼내 보려 한다.

※ 이 글은 ‘브라질 한인 이민 50년’ 연재 글입니다.

브라질 이민 50년, 한 이민자의 삶을 돌아보다 - ⑦ 기다려지는 일요일

 ▶ [브라질 한인 이민 50년 전체 글 목록 보기]

 

지금은 다른 모습이 되었지만,

저 빨간 건물은 1970년대 한인들이 모이던
‘궁전’이라는 식당이 있던 자리다.


브라질 이민 초기,
“오늘 하루를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할까”라는 생각은 사치였다.
밖으로 나가는 일은 제한이 아니라 금지에 가까웠고,
친구를 만나는 일은 꿈도 꾸지 못했다.
사실 초반에는 
친구를 사귈 틈조차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일요일이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특별한 계획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곳에 가면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바로 교회였다.


브라질에 처음 왔을 때
가장 막막했던 것은 언어였다.
한글과 알파벳은 출발선부터 달랐고,
14~15살이라는 나이는
새로운 언어에 완전히 적응하기엔 애매한 시기였다.

어르신들 가운데는
아예 언어를 내려놓은 분들도 많았다.
10년, 20년이 지나도
필요한 말만 겨우 하는 모습은
이민이 시간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임을 보여주었다.

낯선 땅에서의 작은 위로

다행히 브라질은
한인들이 자주 먹는 채소가 비교적 풍부했고,
쌀이 주식인 나라였다.
이런 배경에는
이 땅에 먼저 뿌리내린 일본 이민자들의 공이 컸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근면함 덕분에
같은 얼굴을 가진 한국인들 또한
현지 사회에서 비교적 좋은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반면,
모든 동양인이 일본인으로 보이는 시선 속에서
일본 사람으로 취급받는 불편함도 함께 존재했다.

브라질 현지인들의 성격은 전반적으로 느긋했다.
그들과 함께 일하던 한인들은
처음엔 많이 답답해했다.
모든 걸 빠르고 정확하게 해내는 데 익숙한 우리에게
그들의 방식은 쉽게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느림에도 장점이 있지 않나 생각하게 된다.
건강을 다루는 내 관점에서 보면,
이런 느긋함은 정신적·육체적 건강을
오히려 덜 해치기도 한다.


일요일이 되면
브라질의 일요일은 유난히 조용했다.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고,
도시는 잠시 숨을 고른다.

옛 한인촌이었던 Rua Conde de Sazeda 거리도
일요일이면 조용해졌다.
성당과 교회,
한인 마켓과 약국, 진료실이 모여 있던 그 거리의 낮 풍경은
위험이 잠시 멈춘 듯한
묘한 평온이 느껴지곤 했다.

그 조용한 거리의 끝과 중간중간에는
사람이 모이는 곳들이 있었다.
바로 한인 교회들이었다.

처음 느꼈던 거리감

브라질에 와서 처음 나간 교회는 연합교회였다.

하필 그날은 야외예배가 있는 날이었다.
주변을 보니 아이들이
포르투갈어로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 말들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아, 브라질이구나. 교회도…’
어디에도 끼지 못한 채 서 있었고,
관심을 가져주는 교사도 없었다.

그래서 첫 방문한 연합교회는
나에게 정감을 주는 공간이 되지 못했다.

그날 야외예배에서
기억에 남은 것은 딱 하나,
아이들이 나눠 주던 감자튀김이었다.

처음 맛본 그 감자튀김은
이상하게도 참 맛있었다.

며칠 뒤,
동생이 감자튀김을 발견했다며 사 왔고,
우리는 하루에 몇 개씩 먹었다.
그것이 브라질에서의 일요일,
나의 첫 ‘좋은 기억’이었다.

사람이 있던 교회

얼마 후 여삼춘 가족이 브라질로 오셨고,
우리는 가나안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그곳에는 한국말이 있었다.
작은 교회였지만 사람들이 있었다.
“이번 주도 보게 되는구나.”
그 인사는 그 시절 인사이자 위로였다.

교회에서 어른들은 삶의 정보를 나누었고,
목사님들은 새로 온 이민자들의 집을 직접 찾아다니며
정신적인 어려움을 위로하고,
초기 이민 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왔다.

초기 이민자들이 교회를 통해 받았던 도움 가운데에는
집을 구하기 위한 ‘보증인’ 문제도 있었다.

1981년 무렵 사면령이 내려
많은 이들이 영주권 문제를 해결했지만,
보증인이 없으면 집을 구하는 일은 여전히 어려웠다.

보증인은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문제가 생기면 모든 책임을 함께 져야 하는 자리였다.
그래서 선뜻 나서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며 신뢰를 쌓다가,
보증인이 생기자
어느 순간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교회는 외면하지 않았지만,
사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돌아서기도 했다.

그 시절의 교회는
따뜻함과,
따뜻함을 가장한 계산이
함께 공존하던 공간
이기도 했다.

의류 산업의 급성장과 함께
한인 교계 역시 놀라운 속도로 성장했다.
부흥회가 열릴 때마다
교회마다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그 모든 성장의 중심에는
늘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교회는,
이민자의 삶 속에서
단순한 종교 공간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살게 하던 자리였다.


교회는 완벽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을 외면하지는 않았다.


※ 다음 글에서는
이민 초기 교회 성장의 배경에 있었던
한 사람의 목회자,
김학종 목사님의 이야기를
기록해 보려 합니다.

※ 이 글은 ‘브라질 한인 이민 50년’ 연재 글입니다.

브라질 이민 50년, 한 이민자의 삶을 돌아보다 - ⑥ 살면서 보이기 시작한 것들

  ▶ [브라질 한인 이민 50년 전체 글 목록 보기]

브라질의 좋은 점, 그리고 다른 점

며칠 전, 한의원 앞에서.

오늘은 브라질에서 살며 시간이 흐른 뒤에야 보이기 시작한
좋은 점과 다른 점들을,
내가 겪은 생활의 기억 속에서 정리해 보려 한다.

지난 글들에서는 초기 농업이민 세대 이후,
1970년대 전후 브라질에 도착한 세대가 겪어야 했던
불안과 고통의 시간을 기록했다.

최근 들어 브라질인들의 미국 불법 이민이 급증했고,
체포·수감된 뒤 수갑을 찬 채
브라질로 추방되는 모습이 여러 차례 보도되었다.

그 장면들을 보며
40~50년 전 이 땅에서 같은 불안을 안고 살아야 했던
우리 한인들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겹쳐 떠올랐다.
그 고통을 알기에,
지금의 추방 과정이 조금 더 인간적이었으면
하는 마음도 함께 들었다.

미국은 오래전부터 ‘꿈의 나라’로 여겨졌지만,
돌이켜보면 당시의 브라질 또한
의외로 살아볼 수 있는 나라였다는 사실을
이곳에서 조금씩 알게 되었다.


집을 구한다는 것

브라질 이민 첫 한 달은
옛 한인촌이었던 Rua Conde de Sarzedas에서
오사장님 가족과 함께 방 하나를 쉐어하며 시작되었다.

영주권이 없으면 집을 구할 수 없었고,
영주권이 있어도 보증인과 신용이 필요했다.
집을 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민자에게는 큰 장벽이었다.

부모님은 그 거리가 살 곳이 아니라는 판단 아래
조금 떨어진 Rua Buenos de Andrade로 이사하셨다.
가정집이었고 방이 세 개라
형제들은 이층침대를 쓰며 지냈다.

그러나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다시 급히 이사를 해야 했다.
그 이유를 그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주변 봉제 가정에 대한 연방경찰 단속 때문이었다.


안전을 찾아 옮긴 Cambuci

다음으로 옮긴 곳은
Cambuci의 Rua Professor Camilo Bergenson 14번지였다.
어린 시절 집을 잃어버릴까 봐
아버지가 외우게 하신 긴 주소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그 집은 방이 다섯 개인 큰 집이었고
월세는 당시로서는 큰돈이었다.
그래서 집 일부는
영주권이 없는 다른 한인 가족들과 함께 쉐어했다.

임신한 몸으로 미싱을 돌리던 아주머니,
세 딸을 데리고 추방을 겪은 뒤
조용한 동네를 찾아온 어머니….
그 시절, 집을 함께 산다는 것은
서로에게 위안이자
버텨내기 위한 선택이었다.


브라질에서 좋았던 점들

학교 수업은 오전이면 끝났다.
45년이 지난 뒤에야 홍일이에게 물었다.
“그때 학교 끝나고 뭐 했냐”고.
홍일이는 집에서 아크릴 제품 만드는 일을 도왔다고 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머니가 수놓는 일을 하셔서
그 곁에서 자연스럽게 일을 거들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우리는 알고 있었다.
가족이 함께 노력해야
이 사회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설 수 있다는 것을.

이사한 동네의 거리는 깨끗했다.
쓰레기도 거의 보이지 않았고,
매일 아침 거리 청소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생활 인프라도 인상적이었다.
그 무렵 브라질에서는
칼라 TV가 막 출시되어 보급되기 시작한 시기였고,
한국에서는 여전히 흑백 TV만 보던 때였다.
조금 뒤에는 비디오도 가정에 들어왔는데,
한인들에게는 한국 드라마를 볼 수 있다는 이유로
비디오가 거의 필수품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항공 산업 역시 놀라운 부분이었다.
브라질은 내가 이민 오기 전부터 이미
중형 항공기를 제작해 수출하던 나라였다.

브라질의 항공산업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진행 중인 현실이다.

최근 대한민국 공군은
미국 록히드마틴의 C-130J 대신
브라질 항공기 C-390 수송기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산 수송기를 제치고 브라질 기종이 선정된 것은
가격 경쟁력뿐 아니라
기술 협력과 성능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자가용도 비교적 빨리 가질 수 있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브라질에서는
조금 더 열심히 노력하면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생활이었다.

슈하스까리아는
고기를 좋아하는 한국인들에게
말 그대로 특별한 공간이었다.

상파울로 주변에는
주말에 다녀올 수 있는
좋은 휴양도시와 넓은 해변도 많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사람들이었다.
길을 잃으면 모르는 사람도 데려다주고,
말이 통하지 않아도 도와주려 했던
브라질 사람들의 친절함은
브라질을 살며 느낀
가장 큰 장점이었다.


브라질은 완벽한 나라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분명,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들이 존재했다.
불안한 현실 속에서도
아이들은 학교에 다녔고,
가족은 함께 일하며 하루를 버텼다.
좋음과 다름이 뒤섞인 그 시간들은
이민자의 삶을 조금씩 단단하게 만들었다.

다음 글에서는,
이러한 삶의 흐름 속에서
브라질 한인교회들이 어떻게 성장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성장의 배경에는 어떤 선택과 이유들이 있었는지를
차분히 기록해 보려 한다.

※ 이 글은 ‘브라질 한인 이민 50년’ 연재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