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쿤(Cancun)여행과 나의 장인어른의 이야기
지난 주말 브라질의 어수선한 카니발 기간을 피해 뉴욕으로 간 후, 일요일(2일) 장인어른을 모시고 멕시코의 칸쿤(Cancun)이라는 곳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브라질에 사는 사람들이 칸쿤(Cancun)이라는 곳을 많이 가고는 하는데 해변이 다 거기서 거기인줄 알았다가 막상 와 보니 내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맑은 아름다운 바다가 있는 곳이었다.
호텔 꼭대기 전망대에서 찍은 사진
브라질의 리오(Rio) 해변은 주변의 많은 바위와 지형으로 인해 멋진 모습이라면~
칸쿤해변은 섬처럼 보이는 지형으로 인해 먼 바다에서만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바다의 모습을 담고 있는 듯 하다.
내가 찾아간 이슬라 칸쿤 (Isla Cancún)이라는 휴양지는 호텔들이 즐비한 곳인데
안쪽으로는 아주 커다란 석호(Lagoon)가 있으며 7자 모양의 땅 길이가 23km에 달한다고 한다
위 지도에서 잘 보면 진짜 7자 모양의 길이 만들어져 육지와 연결되었는데 이런 지형으로 인해 바다 색깔이 만화 영화에서나 보는 멋진 색깔이 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된다.
내가 묶은 호텔 뿐 아니라 이곳에 있는 많은 호텔에서도
한 쪽으로는 잔잔한 석호를 감상할 수 있고 다른 한 쪽으로는 바다를 감상할 수 있는
멋진 곳이라 생각된다
잔잔한 석호 Lagoon 모습 (유리창으로 인해 선명도 떨어짐)
호텔 전망대에서 해변으로 찍은 사진 (유리창으로 선명도 떨어짐)
일출 전, 7시 경 사진
여행 바로 전, 87세를 맞으신 장인 어르신께서는 지금도 집 뒤 텃밭에서 여러 농작물을 만드시기에 몸이 좋으실 줄 알았는데, 걷는 운동을 많이 하시질 않아 걸으실 때 약간 불안해 보여 안스러웠다
멕시코 칸쿤 주변을 구경시켜 드리고 여러 볼거리를 가려고 하였지만 장인 어르신이 예전과 다르게 자신이 없으시다고 하시며 거절하셨기에...

택시로 가까운 뷰 포인트라고 하는 Miramar를 들러 사진을 담고~
또 호텔로 돌아와 바로 가까이 있는 Isla 쇼핑센터를 걸어 가 보았는데 쇼핑센터에 소총과 기관총으로 무장한 경비원들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멕시코가 브라질 보다 더 살벌한 곳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쇼핑센터 옆으로 수족관이 있어서 들어가 보았더니, 수족관은 별로였지만 수족관 내에 돌고래와 같이 아이들이 놀 수 있는 체험공간을 만들어 두었다
다른 수족관에서는 볼 수 없는~
돌고래를 만지고, 양쪽 돌고래의 지느러미를 잡고 수영을 하고..
여러 묘기를 선보이기도 하였는데
어림잡아 6~7마리의 많은 돌고래가 있었다.
이번 여행에는 장인어른과 나의 손녀가 같이 동행하였는데..
나의 장인 어른의 유년기는 지금 나의 자녀나 손녀같이 이런 좋은 곳에 올 수 없는
아주 힘든 시기를 보내셨다
6.25 전쟁
그냥 어렵고 힘든 시기가 아닌 6.25 전쟁이라는 아픔 속에서 겪었던 시기였다.
나의 장인 어르신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이곳에 올려놓는 것은 나의 가족이나 처가 식구들의 이야기를 넘어 한 어린이가 당시 6.25 전쟁을 겪으며 자란 이야기이기에
이런 역사의 아픔도 있었다는 것을 후세에게 알리기 위해서다.
나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나의 장인어르신도 황해도에서 출생하셨는데, 출생하신 정확한 곳이 "옹진군 동남면 서장리" 라고 하신다.
나의 아버지는 재령에서 기차 꼭대기에 올라가 식구들과 남쪽으로 피난을 가셨는데 장인 어르신께서는 육로가 아닌 배로 피난을 가셨다 한다.
구글의 지도에서 아버님의 고향 서장리가 어딘지 살펴봤다
좀 더 자세하게...
나무위키에서 "옹진군 동남면 서장리"를 찾아보니 황해도 남쪽, 바로 바닷가 앞에 위치한 곳으로 주위에는 용호도를 비롯하여 많은 섬들이 주위에 있다.
6.25 전쟁이 터지기 전, 장인 어르신은 국민학교 1학년이었는데 장인어른은 어릴 때 부터 아버지를 뵌 적이 없어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신다고 하신다.
전쟁 전 북한에서는 젊은 사람들을 징병하기 위해 끌고 갔는데 이 때 아버지가 산속으로 피신하셨으며 아버지와 같은 처지의 젊은이들을 남쪽으로 피신시켜 주는 일을 하시면서 이 산 저 산에서 숨어 사셨다 한다
질문 : 아버지가 없으셨는데 피난은 어떻게 하셨는데요?
아버지를 본 적이 없지만 전쟁이 터지자 식구들(어머니와 동생 포함 3식구)을 남쪽으로 피신시키기 위해 사람을 보내셨고, 보낸 사람의 도움으로 식구들이 바닷가 인근 땅을 파 놓은 참호 속에 1주일을 숨어 지내다가 몰래 용호도와 백령도로 가서 다시 1달을 숨어 지내다가 어화도 부근으로 온 미군 상륙함으로 배를 타고 가서 1주일인가 10흘 만에 목포에 도착하셨다고 한다.
이런 피난길에서 총을 맞아 죽어간 사람들의 숫자가 피난간 사람의 숫자보다 더 많았다고 하며 상륙함을 타고 가다가 죽으면 군선 화장실을 통해 바로 바다로 던져졌었다고 한다.
PS. 황해도에서 돈과 배가 있는 사람들은 인근 해산물을 인천으로 가서 팔았는데, 이들은 전쟁이 터지자 직접 인천으로 피난갔고, 없는 사람들은 군선을 타고 목포로 피난가는 상황이었다고 하시며 황해도 피난민들이 인천이나 목포에 많이 살게된 이유라고 하신다.
PS. 피신 중에 먹을 물이 없었는데... 바닷가 모래에 구덩이를 파 내면 물이 생기고, 그 물을 퍼내고 그 다음에 생긴 물은 마실 수 있는 물이 되었다고 설명해 주셨다.
질문 : 그러면 아버지는 어떻게 되셨나요?
계속 피난민을 도우는 일을 하시다가 잡혀서 총살당하신 것으로 생각된다고 하심.
질문 : 아버지가 없으셨는데 생활은 어떻게 하셨나요?
장인께서 살던 바다 해변가에는 낙지나 조개, 해삼, 전복, 멸치처럼 생긴 까나리가 많았는데.. 이런 것을 먹기도 했고 1주일에 2번은 마을 사람들과 같이 새벽에 40리(10km) 산 길을 걸어가서 팔아 식량(좁쌀)으로 바꾸어 오셨다 하신다.
국민학교 1학년도 안된 어린 아이가 새벽에 출발하여 저녁에 도착하고, 그 다음 날 돌아오면 변변치 않은 신발로 인해 발은 피투성이가 되었었다 하신다.
질문 : 그러면 마을에 내다 팔 물건은 어머니가 잡으신거네요?
그렇지, 어머니는 바닷가에서 조개며 이것 저것 잡고 나는 팔아 좁쌀 사오고...
(보리는 당시 비싸서 엄두도 못내었던 것으로)
질문 : 목포에 도착하신 후에는 어디에 계셨고 생활은 어떠했는데요?
목포의 국민학교는 학년마다 교실이 1개씩 있는 조그만 곳이었는데 피난민으로 꽉 차는 바람에 그곳 학교의 학생들도 수업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신다.
✔ 목포에서는 맨 처음 눈깔사탕을 파셨고..
(물론 사탕을 만들거나 구한 사람은 어머니였던 것으로..)
✔ 새벽에는 서울과 오가는 기차역에서 껌도 팔았다 하신다
(당시 섬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은 껌을 못 먹어본 사람들이 많았다고)
이렇게 팔아 생긴 약간의 돈으로 보리개를 사 먹었는데... 하루 보리죽 2끼를 먹을 수 있었다고 하신다
💬 보리개란 겨를 벗겨낸 보리를 한 번 깎아낸 것으로 맛이 써서 사카린을 넣어서 쪄 먹었는데 이 보리개를 먹으면 변을 잘 못보아 변을 볼 때 피가 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 그 다음은 돈이 조금 생겨.. 구두약과 솔을 사서 구두를 닦았다고 하시며~
✔ 한 식당 주인이 아침에는 구두를 닦고 오후에는 잔 심부름를 하라고 하였는데 당시 이 식당에는 저녁에 술을 파는 식당으로 시청사람, 경찰, 깡패 등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고 뇌물과 싸움 등이 오가는.. 한마디로 인간극장이었던 것으로....
✔ 다시 나와 구두닦이를 제대로 배워 일을 하였으나 텃세.. 등으로 다시 그만두게 되었고
✔ 원지(예전 먹지에 글을 써서 잉크를 뭍여 복사하는 방법) 만드는 법을 배워 학교의 시험지 같은 복사(프린트)를 하면서 적은 돈이나마 벌 수 있었다 하신다
당시 국민학교도 나오지 않았지만 글을 쓰고 하여 글을 쓰고 복사하는 일을 할 수 있었는데
✔ 이 후 목포의 성산교회를 다니며 교회에서 한글을 배우고 습득하여 교회에 나오는 아이들을 가르치며 주보를 만들어 약간의 돈을 받았다 하신다
✔ 성산교회에서는 학비를 대 주며 3년 동안 과정의 성경학교 가는 것을 권유하며 공부하였는데 학교를 졸업하면 신학교를 갈 수 있다고 하여 공부를 할 수 있었다고...
✔ 성경학교를 졸업하고 해남 초동리에 지방 전도사로 파송되어 주말이 되어 초동리에서 첫 설교를 하였다고 하셨는데 당시 17살 정도 되셨을 것이라 하신다.
✔ 주일 낮 첫 설교 후, 친구가 있는 사랑방에 잠을 자려하는데 도시로 가고픈 많은 시골 여성들이 찾아와 결혼하자고 하는 말에 놀라 바로 다음 날 목포로 돌아오셨다고 하며
✔ 다시 목포로 돌아와 성산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생활하였는데 그제서야 교회에서 받는 보수로 3식구가 생활할 수 있었다 하신다
✔ 목포에서 어머니는 해산물을 까서 되팔아 돈을 버셨고...
✔ 성산교회에서는 서울로 가서 신학교에 들어가라고 하여 서울로 올라갔지만 학비뿐 아니라 생활비도 필요한 상황이라 자신도 없고 비용도 없어 다시 목포로 내려왔고
✔ 당시 병무청에서 일하는 친동생의 도움(?)으로 나이를 2살 올려 호적 신고를 하고 군에 입대할 수 있었다 하신다.
Cancun-2025년 3월 3일, 아침 6시 53분-해뜨기 전
이 외에도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18세가 되기 전 까지 겪으셨던 이야기를 간추려 올려보았다.
장인어르신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5~8살 부터 아버지 없이 어린 나이부터 고생을 하시다가 6.25 전쟁이 터진 후 살아간 모습이 정말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가 아닌가싶다.
우리 자녀들은 이렇게 삶을 견디며 살아오신 부모님들이 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좀 더 나은 인생을 가꾸며 열심히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며..
미국 뉴욕에서 멕시코의 Cancun을 오가는 비행기 창문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으시는 장인어른께서는 밖으로 보이는 모든 풍경을 눈에 담으셨는데...과연 아버님은 창 밖을 보시며 어떤 생각을 많이 하셨던 것일까?
아버님.. 계속 건강하셔서 다음에는 더 좋은 구경을 하러 가셨으면 합니다, 사랑합니다!
- 2025년. 03월 08일 -
장인어르신의 어린시절 이야기가 징~하네요 그시절엔 누구의 이야기라도 그랬지 않을까요?
답글삭제또한 좋은 사위이신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