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 생성 이미지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남겨야 할 이야기
사실 노인회에 대해서 글을 쓰는 것은 늘 조심스럽습니다.
어르신들이 다 보통 분들이 아니시기에… 겪어본 사람만이 압니다. (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용을 쓰고 나면 그다음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기에
오늘은 이 글을 올려봅니다.
서주일 한인회장이 한인회에 있을 당시,
봉헤찌로에는 양지노인회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한인회보 안에 넣을 기사와 함께 한인 단체에 대한 동정을 알기 위해
Rua Correia de Melo 77번지 아파트 11호를 방문했습니다.
“조그만 살라 하나에…” 양지노인회와 기록의 시간
방문한 양지노인회는 계단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어르신들이 오르내리기에는 조금 많아 보이는 계단을 올라가니,
조그만 살라 하나, 조그만 방 두 개, 조그만 부엌이 나옵니다.
그 안에 15명~20명 가량의 어르신들이 계셨고,
모두 식사 중이셨습니다.
양지노인회를 맡고 계신 유경렬 어르신은
등록된 분들이 43명이고,
매일 20명 정도의 어르신들이 점심과 간식을 드시며
여가를 보내신다고 하셨습니다.
당시 정목사님의 부인이신 이상례 사모님께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식사를 챙기시고,
간호사이셔서 아프신 곳도 봐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토요일에는 홍선영이라는 분이 하루를 도우신다고도 하셨고요.
한인회가 회보를 만든다는 소식이
양지노인회 유회장님 귀에 들어갔나 봅니다.
“우리도 회보를 만들겠다”며 비용을 알아봐 달라고 하셨고,
비용을 알려드리자 이번에는
회보를 만들겠다고 하시며
그 안에 좋은 내용의 글과 함께
저에게 한방 칼럼도 써 달라고 하십니다.
아… 이 무슨 날벼락같은 일이 ㅜ-ㅠ
유회장님 성격을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ㅎㅎ
이분이 마음먹으면 일이 커지는 스타일이라
솔직히 거절이라는 선택지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유회장님은
제가 존경하는 김학종 목사님의 오랜 친구분이셨고,
개인적으로도 오래 알고 지내온 분이셨습니다.
다행히 저와는 사돈 관계이기도 해서
다른 분들께 하시던 것보다는
저에게는 조금은 조심하시는 편이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렇다고 일을 피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요.
당시 저는 한인회보 제작뿐 아니라,
완전히 삭제된 한인회 홈페이지를 다시 열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내용을 채우고,
매일 뉴스를 올리며 운영까지 동시에 하고 있었습니다.
홈페이지 운영은 처음이었고,
한인회 사람 중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다들 나보다 더 모르는 분들이었으니까요.
이후 한참 시간이 지나
유회장님께서 노인회 블로그와
어머니 합창단 블로그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도 하셨는데,
어르신들의 욕심은 끝이 없으셨지만
새로운 환경을 만드는 데에는 늘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그 관심은 결국 제 몫이 되긴 했지만요.
그 과정에서, 양지노인회 유회장님은
자신이 만들 회보에 넣을 글이라며
손으로 쓴 여러 장의 원고를 건네주셨습니다.
와… 이걸 한 자 한 자 다 쳐야 한다는 생각에
순간 말이 안 나왔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웃지 못할 사실은,
그게 비단 양지노인회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한인회보를 만들던 당시,
대부분의 분들이 이렇게 종이에 글을 써서 가져오셨습니다.
2010년 10월, 대한노인회의 등장과 두 노인회의 선택
이런 와중에, 2010년 10월
대한노인회 회장님이
‘최근 노인회 동향’이라며
E-mail로 긴 글을 하나 보내오십니다.
“8월 20일 박상식 총영사 노인회 방문. 금일봉 희사…”로 시작해
김형오 전 국회의장과의 두 차례 서신 왕래,
노인회관 이전 문제와 관련한 이메일 교류까지…
공적인 노인회의 흐름이 한눈에 들어오는 내용이었습니다.
(여기서는 글을 줄여 올린 것입니다)
한인회 임원들조차 늘 손글씨 원고를 가져와
스트레스였던 시절에,
노인분이 E-mail로 긴 글을 보내시다니…
솔직히 좀 놀라웠습니다. (웃음)
이 시점에서 두 노인회를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한인회관이 있던 아끌리마썽에는 대한노인회,
봉헤찌로에는 양지노인회가 있었습니다.
대한노인회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유회장님은
봉헤찌로에 양지노인회를 세웠고,
어르신들은 자연스럽게
양지노인회로 모여 놀고 식사도 하게 됩니다.
한편 한인회 소속이던 대한노인회는
한인회관에 남아 있었지만
그곳까지 가는 사람이 거의 없어
4~5명만 남아 있는 상황이 이어졌습니다.
새롭게 대한노인회 회장이 된
김진탁 회장님은 위기감을 느끼셨는지,
한인회관을 나와
월세를 주면서라도 자리를 옮기기로 결단합니다.
Rua Prates 막다른 골목 안, 하얀 집 식당 바로 위.
양지노인회보다 조금 더 큰 공간이었고,
무엇보다 계단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대한노인회는 그곳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양지노인회가 이미 하고 있던 방식,
즉 점심을 제공하며 어르신들이 모이게 하는 구조를
대한노인회도 뒤늦게 도입하게 됩니다.
사실 이 점에서는
양지노인회가 먼저 길을 연 셈이었습니다.
어르신들이 왜 그곳으로 많이 모였는지,
그 이유가 분명히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한노인회는 그 흐름을 보고
“자리를 옮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양지노인회가 하고 있던 방식대로
점심도 제공하며 운영을 바꾸게 됩니다.
다만 양지노인회는 사설로 운영되던 곳이었기에
공적인 지원에는 한계가 있었고,
결국 공적 지원이 가능한 대한노인회 쪽으로
흐름이 서서히 옮겨가게 됩니다.
한인회관이 있는데도
월세까지 주면서 노인회를 옮긴 김진탁 회장님을 두고
욕심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지금에서 보면
그 결정은 옳은 선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후 또 한 번,
월세가 더 비싸지만 더 나은 자리를 찾아 옮기게 되고,
몸이 불편해진 김 회장님을 이어
조복자 여성 회장님이 대한노인회 회장이 되면서
어르신들에게 더 편한 자리,
Rua Amazonas 31번지로 또 한 번 이전하게 됩니다.
여기서 저는 어르신들의 추진력에 놀라게 됩니다.
금전적 부담이 있음에도,
늘 내일을 보고 내리는 결단이었기 때문입니다.
두 노인회는 비록 대립 관계에 있었지만,
한 분은 새로운 노인회를 만들어
어르신들에게 더 나은 환경을 제공했고,
다른 한 분은 자리를 옮기는 결단으로
대한노인회를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대한노인회는 지금까지도
늘 새로운 결단을 통해
자리를 이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 한인사회는 어떤지 돌아봐야 합니다.”
지금 브라질 한인사회는
전체적으로 가라앉은 분위기입니다.
이를 쇄신하기 위해서는,
결국 또 한 번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 결단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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