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이민 사회와 한인 교회에 대한 기록
우리나라 대한민국 사람들이 해외로 나가면, 다른 민족과는 달리 비교적 빠른 성장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브라질 역시 예외는 아니었고, 한인들의 발전은 유독 두드러진 편이었다.
이태리인과 유대인, 아랍인이 주름잡던 브라질의 의류 상권에서 한인들은 빠른 속도로 정착하고 성장해 나갔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현지 종업원들과의 갈등도 적지 않게 발생했다. 그 중심에는 한인 특유의 급한 성격과 언어의 장벽이 있었다.
이러한 ‘급함’은 전쟁 이후의 압축 성장에서 비롯된 것인지, 수천 년 외세 침략 속에서 늘 깨어 있어야 했던 역사적 경험 때문인지, 아니면 타고난 기질의 문제인지 쉽게 단정할 수는 없다. 이는 개인적으로 한국인의 성향을 돌아보며 던져본 질문일 뿐이다.
다만 이러한 성향과 언어 장벽으로 인한 소통의 단절은 브라질 현지인들에게 “한인들은 돈 벌어서 떠날 사람들”이라는 인식을 남겼다. 실제로 많은 한인들이 수십 년의 삶 속에 미국으로 떠나거나 한국으로 역이민을 선택했다. 그 이유는 영주권 문제와 치안이 컸지만, 현지인들이 그런 사정을 알 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인들은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왔고 그 중심에는 늘 한인 교회가 있었다. 이민 초기 목회자들은 우리가 이 땅에 발을 디딘 이유가 우리만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살아갈 이 땅의 아픈 이웃을 외면하지 않기 위함이라는 신념 아래 교회를 세웠다.
내가 있던 교회는 상파울루에 있던 유명한 감옥소 Carandiru의 수감자들을 돌보는 사역도 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특정 교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많은 한인 교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이웃을 돕던 당시의 모습이기도 했다.
연합교회와 한인교회는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우범지역을 떠나지 않으며 주변 현지인들을 돌보는 역할을 감당해 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과연 그 선택이 옳았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답하기 어렵다.
실제로 지난 수십 년간 많은 한인들은 강도 피해 위험 때문에 해당 지역의 교회를 피하기도 했다. 나 역시 두 차례나 차량을 향해 달려드는 강도를 피한 경험이 있다. 다치고 빼앗긴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최근 연합교회가 봉헤찌로로 이전한 것은 다행이지만, 한인교회는 여러 사정으로 아직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나 지금이나, 그 선택을 옳고 그름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 시대에는 그 자리가 필요했고, 이후에는 각 교회가 나름의 판단에 따라 이동했을 뿐이다. 잔지라 교회 역시 처음 세워질 때의 목적과 취지가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교회가 이민 사회 정착을 도왔다
1970년대 전후로 도착한 한인들은 영주권 없이 브라질 땅에 머물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초기 한인 교계는 먼저 정착한 이들 가운데 주거 보증이 가능한 사람들에게 부탁해 집 보증을 서며 이민자들의 정착을 도왔다.
하지만 이는 물질적·정신적 부담이 매우 큰 일이었고, 교회 내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교회의 장로였던 나의 아버지는 보증 요청을 거의 거절하지 않으셨고, 나는 스무 살 무렵 두 달에 한 번꼴로 월세를 내지 않고 사라진 한인들을 찾아다니곤 했다.
비슷한 일은 동생에게도 있었다. 보증을 서주었던 한인 부부가 재계약 시 보증을 거절당하자 따지러 온 일도 있었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런 경우에도 아버지는 결국 다시 보증을 서주셨다.
이런 이야기는 우리 가족만의 경험이 아니었다. 이전 글에서 소개한 영광교회 김학종 목사님 역시 장로 시절 많은 보증을 섰다고 들었다. 그의 아들에 따르면, 이민 초기 아버지는 혹시 도착하는 한인이 있을까 공항에 자주 나가셨다고 한다. 또 다른 목회자의 딸 역시 비슷한 증언을 했다. 우리 아버지도 경찰서를 수시로 드나들며 잡혀간 한인들을 돕곤 하셨다.
이처럼 브라질 이민 초기 교회들은 한인 사회 정착에 큰 역할을 했다. 빠른 성장을 이룬 한인들은 교회 부흥에도 힘을 보탰고, 한 교회가 기도원을 세우자 다른 교회들까지 따라 나서는 분위기도 생겼다. 그러나 이는 반드시 바람직한 흐름만은 아니었고, 결국 감당하지 못할 관리비로 어려움을 겪는 교회도 나타났다.
팬데믹 이후, 교회의 자리
2020년 3월 20일 이후 팬데믹으로 브라질 사회는 멈춰 섰고, 교회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한때 교회 문까지 닫았다가 부분적으로 허용되었지만, 많은 교회는 예배 시간을 대폭 줄이는 선택을 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예배 시간을 더 세분화해 나누었다면 밀집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는 예배 시간을 하나로 줄였고, 이는 결과적으로 교회를 찾지 말라는 방식의 선택이 되었다.
나는 팬데믹 기간 동안 클리닉을 한 번도 닫지 않았다. 그 시기 내원 환자의 절반가량은 우울증을 호소했으며, 젊은 사람과 어르신이 반반이었다. 모두가 두려움 속에 떨고 있었다. 어르신들께 물어보면 “교회에 가고 싶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이민 교회에서 교회는 단순한 종교 시설이 아니다. 그곳에는 사람이 있고, 관계가 있고, 마음이 있다. 특히 어르신들에게 교회는 하루를 버티게 하는 삶의 중심이다. 교회를 가지 못한다는 것은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상당 부분을 잃는 일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교회의 지도자들은 예배 시간을 나누어 사람들을 보듬기보다는, 상황이 조금 나아지자 오히려 밀집을 초래하는 방식의 선택을 했다. 그 결과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공간이 아니라, 코로나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공간처럼 인식되는 비정상적인 상황을 만들었고, 이는 브라질뿐 아니라 대한민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 상황이 더 슬프다.
일반 신자가 판단하지 못한 일이 아니라, 말씀을 가장 잘 알고, 말씀을 전하며, 말씀이 삶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배를 줄이는 선택 앞에서, 왜 목회자들은 그 정도의 생각밖에 하지 못했을까. 나 같은 일반인도 뻔히 떠올릴 수 있었던 결론을, 왜 교회의 얼굴이고 믿음의 본이 되어야 할 사람들은 내리지 못했을까.
답은 어쩌면 단순하다. 몰라서가 아니라, 힘들었기 때문에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힘들 때일수록 먼저 움직이고, 먼저 감당하고, 먼저 버텨야 하는 사람이 바로 그들이 아니었는가.
말씀은 강단에서 계속 선포되었지만, 그 말씀을 먼저 행함으로 보여주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 글은 분노가 아니라 슬픔의 기록이다. 신앙이 무너져서가 아니라, 본이 되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었기 때문에 느낀 슬픔이다.
만약 이 지점에 대한 성찰이 없다면, 브라질 한인 교회는 단순한 시대 변화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침묵으로 인해 더 빠르게 쇠퇴의 길을 걷게 되지 않을까. 그 우려를 남기며 이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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